헛수고란 말을 들으면 힘이 빠진다. 온갖 공을 들여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건만 손에 쥐어지는 게 없을 때 우리는 헛수고라는 말을 한다. 요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열하게 선거전을 펼치는 후보들을 본다. 12번까지 있는 대통령 선거벽보를 보다가 당선의 가능성이 있는 두 사람을 빼고 다른 사람들은 왜 출마를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이미 알려진 몇몇 후보 외에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헛수고란 말이 떠오른다. 일의 효율로 따져보면 괜한 헛수고는 않는 게 맞다. 해도 안될 것 같은 일을 한다는 건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다. 그러면 세상의 일은 될 것 같은 일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게 좀 이상하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을 보면 누가 봐도 헛수고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 왜 했을까? 유시민 작가의 인터뷰 중에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번은 유 작가에게 다시 20대로 돌아가도 민주화 운동을 하겠냐고 물으니 잠시 생각하다 그래도 할 것 같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당시에는 내가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이 나라가 민주화될 것이라 믿고 했던 일은 아니었어요. 만일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그 일을 못했을 겁니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인데 그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분위기였죠. 그런데 해야만 했던 이유는 그 시대를 살면서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못나 보였어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다. 어떤 반대적 증거가 나타나도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본다고 한다. 종교는 그런 면에서 인간의 믿음이 쏠리는 영역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항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종교가 있었다. 종교는 그 시대의 가치 기준을 정하고 사람들의 행동기준이 된다. 유교가 기준가치였던 조선시대에는 돌아가신 부모님 무덤 곁에서 3년을 지키는 일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일이 없다. 중세 유럽은 신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정상적인 여성을 마녀로 몰아 화형 하는 일도 있었다. 지금도 이슬람의 자살테러는 그들의 강한 믿음에 근거한 행동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지배적인 종교는 무엇일까? 없을 것 같지만 ‘과학기술’과 ‘돈’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도 기술과 경제활동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다른 가치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든 기준들은 과학기술에 따른 합리성과 돈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그 지역 사람들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지만 정작 증권가에서는 전쟁 가능성에 따른 자신의 투자 수익률에 더 관심이 크다. 비난할 일은 아니다. 지금의 지배적인 가치인 ‘돈’이라는 종교에 부합하는 방식이니까.
그런데 한 번은 생각해 봐야 한다. 마녀 사냥으로 멀쩡한 사람을 불태운다거나 홍위병을 앞세운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귀한 생명을 죽이고 수 천년 된 문화유산을 스스로 파괴하는 일이 없으려면 적어도 이 믿음이 올바른 것인지 성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지 못하면 인간은 과거의 역사에서 보듯 또다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타인의 욕망을 소비한다는 말이 있다. 수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이나 고급차를 소유하는 이유는 물건의 기능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가는데 돈은 필요하다. 그런데 얼마나 필요하냐고 할 때 그런 게 어딨냐며 무조건 많이 필요하다고 하면 자칫 우리의 삶은 죽을 때까지 오직 화폐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 필요한 건전한 욕망이 탐욕의 수위까지 가지 않도록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