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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 은퇴자의 일하는 이유

by 장용범

‘당신은 왜 일을 하는가?’

이 질문에는 대부분이 나와 가족이 생활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러면 31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정년에 은퇴를 하게 된다면 어떨까? 이것은 ‘당신은 그만큼 일했으니 이제 돈버는 일은 그만해도 된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일이 없는 은퇴자에게 그럴만 하다 여길테고 앞으로 일을 하고 않고는 순전히 그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주말에 책장에 꽂힌 책을 한 권 집어낸다. 재일교포 정치학자 강상중 교수가 쓴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이다. 일 잘하는 법에 대한 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다소 철학적인 문제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일에 대해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자 ‘나다움’의 표현이라고 했다.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은퇴 후의 일의 의미는 은퇴 전과는 좀 달라야 할 것 같다. 은퇴자에게는 사회적 성공이나 더 많은 돈 벌이에 일의 의미를 적용하기 어려워 보인다. 사회적으로도 일에서 벗어나도 좋다는 인정까지 받았으니 이제는 일이 주는 다른 의미를 찾아야 할 시기이다. 사실 세상의 재미난 일들은 돈을 벌지 못하는 곳에 더 많은 것 같다. 여행을 하더라도 여행기자는 여행지에서 일을 해야 하지만 여행자는 그저 여행만 즐기면 된다. 클럽에서 춤을 추더라도 입장객은 돈을 내고 놀면 되지만 무대위의 댄서는 돈 때문에 춤추기 싫어도 춤을 추어야 한다.


최근 나 스스로 한 조직의 사무국장직을 맡겠다고 자원할 일이 생겼다. 작년말 협동조합 영리법인으로 출범한 ‘유라시아 평론’이라는 조직에서다. 처음에는 편집위원의 자격으로 글만 취합하면 된다고 여겼는데 지난 한 달간 법인이 운영되는 상황을 보니 우려되는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친목단체와는 달리 법인격으로 출범했으면 회계와 조직의 의사결정이 투명해야 하고 각종 법률에서 정하는 기준도 맞추어야 하는데 참여자 대부분이 교수나 문화계 인사들이다 보니 그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 처럼 보였다. 지금껏 직장에서 해왔던 조직 운영과 무관하지 않다보니 지켜보는 내내 불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이사분들에게 차라리 나를 사무국장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고, 어제 긴급 이사회가 열려 일사천리로 내가 조직의 사무국장직을 맡게 되었다. 새로 출범한 법인을 운영하는 실무적인 일을 스스로 떠맡은 셈이다. 힘들어 어떡하냐고? 아니다. 몇 가지 이유에서 즐겁고 감사한 일이다. 첫째, 내가 관심있어 하는 대륙관련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둘째, 지난 30년간 직장생활에서 익힌 조직운영에 관한 경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나는 지금껏 대기업의 한 직원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비록 자긴 하지만 법인을 직접 운영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비록 자원봉사지만 나에게는 얻는게 더 많은 선택이라 여겨진다. 이것도 어쩌면 일을 통한 ‘나다움’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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