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부터 상대평가에 익숙하다. 지금은 그러지 않겠지만 고등학교 때는 월례고사라는 시험을 치르고 나면 전교생의 등수를 1등부터 꼴등까지 게시판에 방으로 부쳤던 기억이 있다. 깨알 같은 이름이 나열된 A3 크기의 성적표가 게시판에 걸리는 날이면 서로 보려고 몸싸움을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비인간적이었던 학교 측의 처사였다. 학창 시절부터 체득된 경쟁의식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누군가가 떨어져야 내가 올라가는 구조는 상대와의 협업보다는 내가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보게 한다. 물론 긍정적인 면도 있다. 경쟁을 통해 사회의 발전을 기한 면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경쟁의 부작용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일본에서 만든 광고 중에 마라톤의 영상을 찍은 인상 깊은 광고가 있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다소 식상한 멘트로 시작하는 광고의 도입부는 여느 마라톤 대회를 보여 준다. 그러다 반전이 일어난다. 무리 속에 달리던 한 사람이 갑자기 멈추어 서서는 인생이 왜 마라톤이냐고 반문한다. 그러더니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때까지 한 방향으로 달려가던 다른 주자들도 각자의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마라톤 대회는 엉망이 된다. 어떤 이는 바다로, 어떤 이는 산으로 달려가고 또 어떤 이는 집으로 달려가 아이들의 손을 잡아준다. 한 방향의 가치만 있다면 오직 속도와 경쟁만이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겠지만 각자의 트랙을 달려간다면 그곳엔 오직 ‘나’라는 한 사람만 있다.
우리의 시험은 대부분 상대평가이다. 내가 아무리 잘했어도 남이 나보다 더 잘하면 내 실력은 의미가 없다. 직원 가운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이가 있다. 어느 날 페이스 북에 올라온 그의 이야기를 보니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에서 세무사 시험을 준비한다는 게 대단해 보였지만 중간중간에 올라오는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한 과목씩 차근차근 합격해 가는 중이었고 마침내 최종 합격을 했다는 성공 스토리를 올렸다. 그랬다. 미국의 세무사 시험은 한 과목씩 합격하더라도 특정 점수만 넘기면 되는 절대평가의 시험이었다. 우리처럼 인원수를 제한하는 상대평가의 시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건 무척 합리적으로 보였다. 상대평가는 소수의 특권층을 형성한다. 적어도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엘리트 의식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길거리 전단지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처음 들어섰을 때 인천공항 계약직 직원들을 정규직화 하겠다는 공약을 이행하려고 하자 기존의 정규직 직원들이 보인 반발이다. 자신들은 정규직으로 들어오기 위해 그렇게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는데 이건 불공정한 처사라며 반대한다는 전단지였다. 동의할 수 없었다. 적어도 입사의 루트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각자는 인천공항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일을 하는 동료들이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입학만 하고 나면, 입사만 하고 나면 나머지는 그냥 보장되는 과거급제식 시스템은 새로운 계급을 만드는 사회적 갈등을 부추긴다.
사회는 그렇다 쳐도 내가 평가하는 내 인생만큼은 절대평가여야겠다. 수년 전, 서울에서 부산으로 자전거를 타고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현풍 근처를 지날 무렵 갈증에 목은 타고 다리가 풀려 더 이상 페달을 저을 힘도 없을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토닥임이었다. 인생은 하나의 결승점이 있는 마라톤이 아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나의 트랙이고 내가 가는 만큼이 나의 결승점이다. 이것이 경쟁의 끝무렵인 50대를 넘기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