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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이만하면 되었다

by 장용범

지금 어떤 바람이 있을까? 별로 없다.

그러면 꼭 가지고 싶은 것이 있을까? 음.. 역시 별로 없다. 요즘 내 생활이 이렇다. 그래서 하루를 참 평온하게 보내는 편이다. 어쩌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평온한 시간들인 것 같다. 양가 부모님 모두 건강하게 살아 계시고, 아이들은 스무 살 넘은 성인으로 키워냈다. 길었던 직장생활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도 큰 부자는 아니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준은 된다. 살고 있는 나라도 조금 시끄럽긴 하지만 외부에서 부러워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이 모든 걸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할 일들이다. 뭐랄까? 이만하면 되었다는 느낌도 든다. 삶의 역동성이 사라진 것 같지만 그것과는 좀 다르다. 무엇보다 편안한 가운데 놓인 일들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있다. 꼭 해야 한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하다 보면 스르르 몰입되는 경험을 자주 한다. 뭐랄까, 그것을 꼭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그 일과 내가 하나가 된 느낌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별로 없고 지난 과거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이게 참 이상하다. 기를 쓰고 무언가를 하려 할 때 보다 마음은 편안한데 일은 더 잘 되는 느낌이다.


칙센트 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박사가 말하는 몰입(Flow)의 상태처럼 물 흐르듯 편안한 느낌이기도 하고 뭔가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몰입의 상태는 외부적인 보상도 필요 없고 그 일을 하는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하는데 뭔가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충만한 느낌이 있다. 나로서는 참 드문 경험인데 여기에 이르게 된 배경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선 크게 기대하거나 바라는 바가 없어졌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과 일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예전에는 여기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업무 추진에 앞장도 섰으나 이제 그럴 시기는 지났고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수준으로 넘어가고 있다. 회사의 주인공이 내가 아님을 아는 까닭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별 기대감이 없는데 불과 작년에 은퇴하신 선배들에 대해 내가 까맣게 잊고 지내듯 이들도 이내 나를 잊을 것이다. 모두가 한 때의 시절 인연들이라 여기고 있다.


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다.

그냥 그 일을 하는 과정이 재미나고 좋아서 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꼭 해야 한다기보다는 끌림이 있어 시작했고, 하다 보니 재미있어 계속하게 되는 일들이다. 글쓰기가 그렇고 외부 사람들과의 만남도 그렇다. 일하기 위해 쉬었던 것이 이전의 방식이라면 지금은 쉬기 위해 일한다는 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요즘은 끌리거나 재미없으면 되도록 하지 않으려 한다.


셋, 굳이 더 벌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과 비교해 많이 가진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질 수 있는 수준이 딱 이 정도려니 생각키로 했다. 돈을 버는 일은 참 피곤한 일이다. 회사에서도 그만 나가라고 하는 상황에 굳이 돈 때문에 새로운 일을 벌이거나 남의 집 머슴살이를 더 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벌면 얼마나 더 벌 것인가. 반면에 나의 정신과 육체는 언제까지 건강함을 유지할 것인가. 소유를 위한 억척스러움 보다는 인생의 추억 쌓기를 위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할 때이다. 백세를 넘긴 김형석 교수의 말씀처럼 ‘이제는 직장을 벗어나 사회 속의 개인으로 거듭날 시점’ 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넷, 남의 평가나 시선에서 좀 자유로워졌다.

래퍼 제시가 경연 대회에서 했던 말이 있다. “너희들이 뭔데 나를 평가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내 삶의 방식과 정답은 내가 정하기로 했다. 일단 별로 잘 보이고 싶지가 않다. 타인에 대해서도 “그러라 그래”라며 좀 떨어져 보게 되니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다.


이 모든 상황들을 보면 감사함이 저변에 깔려있다. “나에게 이 모든 것을 허락하여 주신 주님과 부처님과 조상님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은 삶도 지금처럼 그리 살아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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