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PC가 보급될 무렵 저장매체는 플로피디스크였다. 정사각형의 얇고 펄럭이는 그것에다 자료를 저장할라치면 PC는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는 듯 소음을 내며 꽤나 요란을 떨었다. 그 후 USB로 이어졌지만 요즘은 저장매체를 굳이 들고 다니지 않는다. 대부분이 클라우드 환경이나 웹 호스트의 서버에 저장되어 나의 자료를 내가 가지고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기껏해야 내 노트북에나 저장하겠지만 그것도 용량을 차지하는 게 싫어 구글 드라이버 같은 곳에 저장하고 만다.
이번에 러시아에 대한 스위프트 경제제재를 보며 드는 생각이 있다. 스위프트 경제제재란 국제 금융결제망에서 퇴출시키는 고강도 제재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제에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비록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상당하지만 그것을 찾을 방법이 없어서다. 개인으로 치면 은행에 잔고는 많은데 은행 전산에 접근할 방법이 죄다 끊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외환보유고란 게 디지털 숫자이지 금고에 가득 쌓아둔 달러 지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산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예금이나 금융자산은 휴대폰에 찍힌 숫자를 보여주는 것이지 장롱 속에 쟁여둔 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재산이란 무언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침팬지에 비해 유전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도 지구의 지배 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집단의 능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 사과를 든 침팬지와 바나나를 든 침팬지가 있다 치자. 둘은 서로가 가진 것을 교환할 수가 있다. 한 녀석이 바나나를 주면 다른 녀석은 사과를 건네 원시적인 형태의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한 녀석이 만 원짜리 지폐를 들고 다른 녀석의 바나나와 교환하려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침팬지도 지폐를 받고 바나나를 건네지는 않을 것이다. 침팬지는 보이지 않는 것, 추상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보이는 것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국가란 것도 그렇다. 땅 위에 경계를 그으면 국가인가? 그렇지는 않다. 국가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다. 민족이란 것도 그러한데 너와 나는 다르다는 허구의 믿음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을 자초한다. 손 위의 사과 한 알 보다 은행 계정의 숫자를 더 선호하는 믿음이 인류를 지구 상의 지배종으로 만들었다는 게 유발 하라리의 주장이다.
어느 날 인류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고 상상해 보자. 국가가 사라지고 화폐가 사라진다. 대학이나 학위가 소용없고 종교나 법률이 사라지니 스님이나 목사, 변호사, 국회의원이라는 직업들도 사라진다. 숫자가 사라지니 과학의 발전도 없다. 특이하게도 인간의 직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룰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하는데 농부나 어부보다는 판검사나 대통령의 영향력이 더 크다. 이리되면 인류는 한순간에 나무 잘 타는 침팬지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추상적과 실재적인 것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고통을 느끼는지 여부에 두었다. 국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총에 맞은 국민은 고통을 느낀다. 인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지구 상의 우세종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다른 동물들은 받지 않아도 될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인간은 실재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허구나 허상의 것에 더 집착한다. 돈과 권력, 명예, 도덕, 법률, 브랜드, 의미, 미래, 과거 등등. 하지만 그 대상들 자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실재하는 것은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허상의 것이 실재하는 것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국가, 이념, 종교라는 허상의 것들 때문에 상대의 총알이 나에게 날아와 박힌다면 인간이 침팬지보다 나을게 무언가. 허상의 것들은 실존하는 것들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