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을 못보는 인간이기에 미래의 일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과연 미래의 일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다음주 로또 번호를 알아 내어 1등으로 당첨 될 수도 있겠고, 닥쳐올 불행을 미리 피할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능력을 갖추어선 안되고 오직 나 만이 미래의 일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앞으로 닥쳐올 일을 아는 상황이면 그 일 자체가 안 일어날 수도 있다. 로또 당첨번호를 모두가 안다는 것은 당첨 금액이 형편없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고, 미래의 사고를 미리 안다는 것은 서로 그 상황을 피할 것이기에 애초에 그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맞물려 발생한다. 만일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 때 만난 나를 죽여버렸다고 치자. 그러면 과거로 돌아갈 내가 없어지는 것이니 처음부터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이 일어나는 주체인 인(因)이 있고, 그것과 결합되는 무언가의 연(緣)이 있어 가능하다. 불씨가 일어나도 주위에 태울 만한 것이 없으면 한 때의 섬광으로 끝나고 말듯이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원인 제공자인 인(因)이지만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숨을 한 번 쉬더라도 공기라는 연(緣)이 있어야 가능하니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결국은 서로가 관계 지음이다. 이러한 관계는 나도 좋고 너도 좋은 상생관계가 최상의 관계인데 좋은 관계가 곧 좋은 인연인 셈이다. 이것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도 그런 것 같다.
“가난할 때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자기에 대한 존중감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가 된 다음에, 먹고살 만해진 다음에도 계속 부를 증식시키고자 한다면 그건 바보거나 광인이다.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_고미숙의 <나의 운명사용설명서> 중에서
연말에 김치냉장고를 교체했다. 그 옆에는 양쪽으로 문이 달린 냉장고가 또 있다. 70년대를 살아온 나는 집에 냉장고를 처음 들인 날을 기억한다. 그 시절엔 수박을 대야의 물에 담궈 식혀 먹었고 얼음이 필요하면 얼음집에 얼음을 사러 가던 시절이었는데 얼음집 아저씨는 커다란 얼음을 톱으로 작게 잘라 새끼줄에 달아 팔던 시절이었다. 그런 기억을 가졌기에 지금의 냉장고와 그 옆의 김치냉장고를 보면 한 번씩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어릴적 냉장고엔 김치나 물, 수박 한 덩이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냉장고가 가득차 넣을 데가 없다고 불평하는 시대이다. 자본주의는 소유와 증식의 무한반복인 경제체제이다. 모두가 끝없이 욕망하고 더 가지려고만 하지 이만하면 되었다는 마음은 없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만 추구하다 가는 인생이라면 어쩐지 좀 허무하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가치는 함께 가야 조화로운 상생의 원리가 일어난다. 권력이나 부에 관해서는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총량이 어느정도 정해진 것 같다는 믿음이 있다. 사주명리학에는 인간사의 모든 것이라 할 비겁, 식상, 재성, 관성, 인성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든 이 모두를 골고루 갖춘 사주는 없다고 한다. 하나가 많으면 하나는 적은 식으로 불균형한 것이 인간 사주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것은 덜어내고 적은 것은 채워가는 식으로 살아야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태과(지나침)은 불급(모자람)보다 못하다는 게 사주명리학의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