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악은 의도가 없다. 의지가 있을 뿐이다. 왜 죽였니? 왜 때렸니? 왜 그랬니? 악이 답한다. “그냥 그러고 싶었는데, 마침 그럴 수 있어서, 그때 그랬을 뿐.”
<중략>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 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하는 것을 넘어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존중감을 파괴한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정희진처럼 읽기> 중에서
지금 지구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생각해 본다. 너와 내가 진영이 다르면 나는 너를 죽이는 게 정당한 상황이다. 인류에게 무기의 발전은 직접적으로 상대를 마주하지 않아도 살인이 가능한 상태를 만들었다. 눈앞의 인간을 내가 칼이나 창을 쥐고서 베고 찌르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피가 튀고 내장이 튀어나온다. 비록 내가 살기 위해 그를 죽여야 했지만 그 후 살아남은 자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그가 가학적인 정신상태를 가진 사이코 패스가 아닌 이상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고통에 쾌감을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또 그렇게 더 살아본들 기껏 100년도 못 살지 않은가.
평화운동가이자 여성학 연구가인 정희진의 저 문장은 그녀가 <신약성서>의 한 구절을 보며 느낀 점이다. 성서에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하고선 ‘누군가 오르 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로 이어진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믿음에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인간의 악함은 단지 그것이 발현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뿐이지 그럴 기회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튀어나오는 잠재된 본능 같다. 우리는 45억 년 된 지구 위에서 수 만년에 걸쳐 진화해 온 생명체이고 스스로 규정한 법과 도덕을 지키기 시작한 건 너무도 미미한 기간들이다. 그리보면 우리가 본능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이 절제되지 않은 본능의 지배를 받으며 행하는 많은 일들에는 악으로 규정되는 것들이 많다. 비록 눈앞의 인간이 죽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내가 쏜 총알에 수 킬로미터 떨어진 한 인간이 고꾸라진다. 나에게는 한 남자가 멀리서 쓰러지는 모습만 보일 뿐 그의 부모와 아내, 자녀들의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누른 버튼 하나로 하늘 저 멀리 미사일이 날아갔고 그로 인해 한 단란한 가정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내 행위의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행위가 악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럴 기회나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 우리는 잠재적으로 언제든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가 저지른 악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 “왜?”라고 묻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 나의 물음에 상대가 “그냥 그러고 싶어서.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너무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절망감을 상상해 보라. 그런 면에서 정희진이 말하고 싶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해석에 수긍이 된다. 악한 활동으로 한쪽의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너무도 짧지만,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한 피해자가 된다고 했다. 이 말이 이상하다 여겨지고 뭔가 보복을 해야 할 것도 같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한쪽은 종군위안부로 입었던 상처가 너무도 큰데 정작 악의 행위자는 그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다. 피해자는 계속 “왜?”라고 묻는데 “그냥 그러고 싶었는데 마침 할 수 있는 여건이어서”라는 말을 듣는다면 증오가 일어날 것인가. 악은 여건만 되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 한 때 피해자였던 우리도 베트남 전쟁에서는 얼마나 많은 악을 저질렀던가. 그런 악을 대하는 방법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떠올려 보았다. ‘첫 번째 화살은 맞을지언정,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는 것이다. 즉, 타인의 악행으로 한 때의 피해자가 될지라도 그에 대해 “왜?”라고 묻는다면 영원한 피해자로 남을 것 같다. 누군가 저지른 악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의지만 있기 때문에 이유가 없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게 길게 보면 손해보지 않는 길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