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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 사람에게 배우는 이유

by 장용범

인류의 배운다는 능력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계의 다른 생물들도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기능이다. 하지만 인류의 차이점은 그것을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데 있다. 세대를 지날수록 축적되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확장될수록 그의 지식의 수준은 깊어지고 광범위해진다. 게다가 컴퓨터의 출현과 메모리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계산능력과 기억력을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압도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러 급기야는 인공지능이라는 단계까지 올라섰다. 여기서 교육계에서는 고민이 하나 생겼나 보다. 가르치는 인공지능은 가능한가.

사실 지식의 축적량으로 보면 인간이 인공지능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을 가르치는 일도 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지만 뭔가 좀 불편하다. 아침에 만원 버스에 시달리면서 학교에 도착한 학생들 앞에 교실의 앞문이 열리고 인공지능 선생이 들어와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어떤 느낌이 들것인가. 아니 학교란 곳에 갈 이유도 없다. 지금도 집이나 카페에서 비대면 수업을 하면 웬만한 지식은 얼추 습득할 수 있으니 굳이 교사가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다. 지식수준과 학습의 효과적인 면에서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인공지능이 인간 교사의 역할을 대체할 사회를 상상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엔 아니라고 본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적 물음을 던졌을 때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언어적 무게와 달리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나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독배를 마시는 그 인격에 감동하는 것이지 단지 그가 던진 말 한마디에 감동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의 무게는 그 사람의 품격에서 나온다. 그런면에서 나는 요즘의 랩이나 힙합이라는 음악이 불편하다. 가수들의 문신이나 액세서리, 욕설을 포함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정돈되지 않은 가사도 그렇지만 제목이 ‘쇼 미더 머니’ 라거나 일부 가수들의 무절제한 소비행태에서 이건 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의 저 모습이 어른들로부터 배웠지 누구에게 배웠겠는가. 그들의 탓만도 아니겠다.

교육이라는 행위는 배우고 가르치는 주체 그리고 가르치려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인간을 대체한 인공지능에게서 배우는 것이 불편할까. 인간은 정서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물도 마찬가지다.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어미가 죽은 침팬지 새끼를 넣은 우리에 한쪽에는 헝겊으로 만든 어미 인형을 두고 반대편에는 철사로 만든 어미 인형을 두었다고 한다. 헝겊으로 만든 인형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철사를 엮어 만든 인형에는 젖이 나오는 장치를 해두었다. 어린 침팬지의 행동이 어떠했을까. 하루 중 대부분은 헝겊인형에 붙어있다가 배가 고플 때 철사로 만든 어미 인형에 잠시 가서는 젖을 먹고 다시 헝겊인형으로 왔다고 한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이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성장을 멈춘 인간은 죽고 있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성장은 배움에 있다. 하지만 그 배움도 정서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일 교사가 자신의 역할을 가르치는 역할이라고 정의하면 인공지능에 대체되어도 할 말이 없지만 한 인간을 가르치는 인격이라고 하면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을 것이다. 인간은 머리에 앞서 마음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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