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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_비행 가능시간 12년

by 장용범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사람은 그때그때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운명이라는 틀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안주하면 시간은 더욱 고통스러워질 뿐입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나를 파악하고 판단해야 합니다.’_’ 소노 아야코’의 <노인이 되지 않는 법> 중에서


올해 85세가 되신 내 아버님을 뵈면 지금 많이 답답하시겠다는 마음이 든다. 내가 대학시절이었지 싶다. 한 번은 아버지가 자동차 계기판이 다시 ‘영’이 되었다고 하셨다. 당시는 면허도 없고 차를 직접 운전하지도 않았기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나중에 직접 차를 몰게 되고 계기판 주행거리를 보면서 당시 아버지가 당신의 자동차로 100만 킬로를 탔다는 말씀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가 운전자에게는 얼마나 달성하기 힘든 수치인지도 말이다. 자동차는 운행거리가 999,999킬로를 넘어서면 계기판이 다시 ‘000,000’ 이 되는 것이었다. 하셨던 업종이 기사들을 통해 대형 유조차를 운영하는 운수업을 하셨고 당신의 승용차를 폼나게 바꾸기보다는 그 돈에 보태어 유조차를 더 구입하려는 마음이 더 하셨을 것이다. 당시 아버지의 승용차는 쌍용에서 만든 찦차였다. 차를 바꾸어도 늘 사륜구동 찦차를 고집하셨는데 사람도 타겠지만 차량 부품이나 짐을 싣기에도 편하다는 이유가 컸다.


그런 아버지도 연세가 드시니 운전이 힘에 부치셨는데 70대 초반에 면허증을 반납하셨다. 그 후로 아버님의 주된 활동 반경은 대폭 줄어들어 대중교통 범위인 시내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80세 정도가 되시자 이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가끔이고 주로 집 주위가 활동반경이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지팡이를 의존해야 집 밖이라도 나가시는데 아직도 지팡이 짚는 법이 익숙지 않으신지 보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보통 지팡이가 먼저 나가고 왼발 오른발이 나가야 하는데 아버님의 급한 성품은 상체가 먼저 나가고 발이 따라가지 못한 상태에서 지팡이가 제일 마지막에 따라오는 식이니 오히려 지팡이에 발이 걸려 넘어질 것 같아 불안하다. 지팡이 짚는 연습을 좀 하시라는 나의 잔소리는 흘려들으시더니 최근에는 걷다가 넘어지는 사고도 생겼었다. 다행히 가벼운 찰과상을 입으셨지만 ‘마음처럼 발이 따라오지 않았다’는 말씀에 가족들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사람의 활동반경은 나이에 따라 축소되게 마련이다. 나의 아버님이 연세에 맞게 이용하시던 교통수단을 대입해 보면 70세 정도까지는 스스로 운전을 하셨고 비행기를 타고 여동생이 사는 호주에도 왕래하셨었다. 하지만 면허증을 반납한 70대 후로는 비행기를 안 타게 되셨는데 심혈관 계통의 이상으로 의사가 가능하면 비행기를 타지 말라는 권유가 있었다. 그래도 지하철 같은 시내 교통수단을 이용하거나 KTX 타고 서울에는 가끔 올라오셨는데 그마저도 80세를 넘기시니 힘에 부치셨는지 이제는 거의 동네도 잘 안 나가시고 집안에서 걷거나 건물 옥상에 올라가는 것으로 활동반경이 줄어들었다.


그때그때 당신의 상황에 맞게 활동반경을 줄여 오셨지만 과거를 회상하면 그렇게 왕성했던 역마살이 그리울 것 같다. 아버지를 뵈며 연령대별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과 활동반경을 추정해 보았다.


현재 ~ 65세 : 비행기, 전 세계 어디나 가능

66세~70세 : 비행기, 중국, 호주, 동남아 정도

71세~75세 : 면허증 반납, 국내여행 가능

76세~80세 : 시내 교통수단, 시내 정도 가능

81세~85세 : 지팡이, 동네 나들이 수준

85세~ 끝 : 건강하다면 집안 (If Not) 병원 병상


이리 보면 내가 외국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시간은 겨우 12년 정도 남은 셈이다. 생각보다 그리 많지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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