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무렵 동생처럼 지내는 직장 동료가 저녁을 먹고 가시겠냐고 문자가 왔다. 평소 성향을 아는터라 할 말이 있나보다 여겼다. 퇴근길에 만나 순대국집에서 저녁을 겸한 가벼운 소주잔을 기울였다. 잠시 뜸을 들이드니 역시나 주말에 장례식장을 알아봐야 겠다고 했다. 지방에서 사업을 하시는 아버님이 대학로 근처에 방을 구해 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최근 병원측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했나 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아버지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신의 병이 이처럼 위중한데도 자신의 아버지는 여전히 사업에 미련을 두고 계시다고 했다. 그만 정리하시라고 해도 꼭 자신이 직접 해야한다며 팔순 노인이 노욕을 부린다고도 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니 자신의 아버지는 남은 생의 정리를 제대로 못하실 것 같다며 낯빛이 어두워졌다. 최근에는 코로나 영향으로 서울지역 화장장 잡기도 어려워 주말쯤 인천에 가서 알아보겠다기에 아직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너무 서두를 필요가 있냐고 하니 요즘은 죽음 후의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내 아버님이 보고 싶어졌다. 지난 설날 찾아뵙고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수시로 안부 전화를 드리고 별일 없다는 말씀은 듣고 있지만 내가 너무 성의없는 아들 같았다. 명절 방문은 가족들과 밀물처럼 들이닥쳐 썰물처럼 빠져나오는 순방식 행사가 되고 보니 부모님과 차분하게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다.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서울역으로 갔다. 열차에 몸을 실으니 세 시간도 안 되어 부산에 도착했다. 어찌보면 참 가까운 거리이다. 두 분을 놀래킬 요량으로 아들의 도착소식을 알리지 않고 집 근처에서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통화를 하면서 현관 초인종을 누르니 아버지가 “잠시만, 누가 왔나보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문앞에 휴대폰을 들고 서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시더니 주름진 얼굴이 활짝 피셨다. 그런데 집안 전체가 어두워 스위치를 올리며 불을 왜 안켜시냐고 했더니 혼자 있는데 괜히 전기세 많이 나올까봐 불을 끄셨다고 하신다. 만학열이 한창이신 어머님이 오후에 학교를 가시면 아버지는 불을 끄고 집안에서 혼자 지내셨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불편했다. 면도를 안하신 얼굴에 이전보다 수척해지신 것 같아 “면도나 좀 하시지”라며 수염난 얼굴을 만지는 아들의 투정에 “밖에 나갈 일이 없어서..”라며 선생에게 지적받은 학생처럼 쑥스러워 하신다. 오랜만에 부자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수업을 마친 어머니가 오셨다. 그제야 80대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안 분위기가 활짝 살아났다. 아버지는 슬며시 일어나시더니 이내 면도를 하고는 다시 나오셨다. 아들의 지적이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오랜만에 큰 아들 왔다고 어머니가 솜씨 발휘하신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모처럼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저리도 좋아라 하시는데 마음만 내면 이렇듯 금방 올 것을 그간 나도 참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