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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 N 잡러의 삶을 보다

by 장용범

최재원이라는 분의 N 잡러 관련 강연을 다녀왔다. 내가 아는 N 잡러는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업하기도 힘들고 하니 소득이 낮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원하는 소득을 맞춘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비록 강사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N 잡러의 일하는 방식을 듣고 싶어 신청을 했던 강의였다. 대부분 젊은 여성층이 많았는데 그들의 취업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가장 나이 많은 청중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와 N 잡러는 별로 관계없는 컨셉일수도 있다. 당장 취업을 해야 하는 세대도 아니고 이미 한 직장에서 잘 벌어먹고 정년으로 은퇴하는 처지이니 그들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그런데 두 시간 정도 강연을 들으며 드는 생각은 강사가 소개하는 N 잡러 가 되는 방식이 지금 내가 가는 궤적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자신이 끌리는 일을 버킷 리스트로 정한다. 강사의 버킷리스트에는 자메이카 해변에서 바텐더로 일하기, 요트 타고 항해하기 등 얼핏 황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 리스트 옆에다 기입했던 내용이었다. 그것은 본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버킷리스트 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적어 두었다는 것이다. 자메이카 해변의 바텐더가 당장 되기는 어렵겠지만 칵테일 학원에 등록하고 수강할 수는 있다. 지금 요트를 타고 항해를 하기는 어렵지만 국내 요트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필기시험 준비는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예이다.


나의 경우엔 유라시아 대륙 여행을 하는 것이 나의 버킷리스트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당장 할 수 있었던 일이 러시아어 학원에 등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연결 지어진 여러 사건들을 생각하면 신기할 때가 있다. 관심이 그쪽에 가 있다 보니 서점에서 ‘유라시아 견문록’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고 저자에게 연락을 취해 ‘대륙 학교’를 소개받았다. 그때의 인연으로 국내의 북방 관련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지금은 유라시아 평론이라는 인터넷 신문의 실무적인 일에 관여하고 있으니 이 모든 게 유라시아 대륙 여행이라는 버킷리스트 옆에 러시아어 공부라는 구체성에서 출발한 일들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버킷리스트 하라 그리고 지금 여기서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시작하라’고 조언하는 강사의 말에 수긍되어진다.


강사의 다음 조언은 처음 시작할 때는 ‘내려놓고 시작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고 짧은 시간에 성취를 맛볼 수 있는 것을 권했다. 진행하는 것이 안 되었을 때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바텐더를 하겠다고 학원을 다니는데 안 되어본들 날리는 게 학원비 밖에 더 있겠는가. 나는 여기에 하나 더 보태고 싶다. 그래도 최소 3개월은 버텨보라는 것이다. 그러고도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접어버리는 것이다. 3개월 버티고 잘 모르겠다면 다시 3개월 정도 더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급하게 생각할 것 없이 N 잡러의 시작은 끌리는 일을 꿈으로만 두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고 재미가 있으면 계속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처음부터 돈을 벌기는 어렵다. 그냥 단순하게 끌리는 것이니 시작하는 것이고 재미있으니 계속하게 되고 계속하니 잘하게 되는 게 수순이다. N 잡러의 돈벌이는 제일 마지막 단계에서 실현 가능해 보인다.


커뮤니티를 언급했다. N 잡러는 기존의 커뮤니티에 들어가 탁월한 존재로 성장하는 법도 있지만 스스로 커뮤니티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무언가를 시작하는데 혼자서 하면 길게 오래가지 못한다. 같은 생각을 하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격려하는 가운데 점점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대학원 입학 후 결성한 매일 글쓰기 모임은 의도치 않게 내가 커뮤니티를 이끄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나는 블로그 글쓰기를 매일 하며 이런 좋은 게 있다는 걸 공유하고 싶어 시작했는데 어느덧 600일이 넘어갔다. 이제 졸업을 앞둔 시점에 모임의 새로운 전환을 도모할 때가 되었는데 방향은 어느 정도 공감했으니 향후 계획에 대한 구상 중이다. 이것도 N 잡러의 한 특성이라니 그간 몸소 실천한 셈이다.


그리고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최재원 강사는 햇볕도 들지 않고 창문을 열면 옆 건물의 벽이 닿이는 합정동 빌라에 살면서도 에어비앤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한 경험들을 꾸준히 블로그에 글로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나중에 책이 되고, 그것을 본 기업에서 연락이 오고 본인의 사업체를 만드는 것으로 발전하더라는 것이다. 이 또한 공감되는 대목이다. 스스로가 남보다 탁월할 게 없는 애매함만 지녔다 여겨지면 매일의 기록만큼 탁월해질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기록의 매체는 각자가 정할 일이다. 글, 그림, 영상 등이 있겠지만 이왕이면 디지털 매체에 기록하여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확장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강의를 들은 결론은 N 잡러 가 되는 법이 아주 특별한 데 있지 않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식이 N 잡러 가 되는 길임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호기심과 재미에 끌려 시작한 일들인데 나도 모르게 중년의 N 잡러 가 되어가는 길에 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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