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않는 게 좋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 대한 애정이나 일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이라면 직접 해야 하는 것과 누군가를 통해 할 것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말이 적당할 것 같다. 현장의 영업 편익을 위해 전산을 좀 수정해야 할 일이 생겼다. IT 종사자들의 성향은 자신들의 시스템을 일정에 없던 요구에 의해 수정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부서 내 한 직원은 몇 차례 시도하다 이런저런 장벽에 막혀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직원의 잘못만은 아니다. 각 부서의 이해관계가 다를 뿐이니까. 이럴 땐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게 낫다. 현장 영업을 총괄하는 부서에다 그들이 요구할 가이드라인을 주고 대표이사의 지시를 통해 관철시키는 방법이다. 해당 부서장과 실무 책임자에게 전산 변경의 필요성에 대한 협조 메일을 넣고 마치 그들이 진행하는 것처럼 대표이사에게 보고하게 했다. 나중에 들으니 IT 부서가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그 직원은 이 사실이 못마땅한가 보다. 자신이 주장할 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안 된다고 하더니 하루아침에 상황이 바뀌었으니 화가 날만도 하다. 나는 직원의 보고를 받을 때부터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우회적인 방법을 고려하고 있었다. 비록 우리 부서의 역할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된 거다. 세상에는 이처럼 정상적인 방법보다 우회적인 방법이 통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다 적용할 내용은 아니다. 가능하면 정상적인 체계를 밟아 진행해야 한다. 만일 정상적인 방법보다 변칙적인 방법이 일상화되면 그 조직은 제대로 굴러가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번 건은 IT부서의 사전 일정에 없던 일을 진행시킨 것이니 누군가는 고생을 좀 했을 것이다. 직장인들은 가능하면 일을 덜 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으니 자발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않는 게 낫다.
기대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 아니면 어떤 상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마음을 내려두면 여러모로 편안한 상황이 이어진다. 기대하지 않으니 상대에 대해 좀 너그러울 수 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지 않다는 얘기다. 기대하지 않으니 어떤 결과가 나와도 좋다. 된다는 생각을 않았으니 안 되어도 수용이 되고 되었다면 좋은 것이다. 사람에게도 그러하다. 가끔 상사들이 부하직원에게 하는 말이 “실망이야”라는 말이다. 누가 실망했는가? 상사다. 부하직원을 분발시키려는 한 마디일 수도 있지만 그 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상사의 기준에 내가 맞추어야 할 이유가 뭔가 싶다.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 나를 다그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나는 사라지고 누군가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사람에게 기대를 않는다는 게 상대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참 이기적인 태도인데 내 마음의 안정을 흩트리는 일을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의 마지막 해가 되니 이런저런 기대를 내려놓게 된다. 회사가 직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나 과거 함께 했던 직원이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한결같이 대할 것이라는 기대도 내려놓게 되었다. 기대는 나의 욕망이다. 욕망은 충족되면 좋지만 아닐 경우 실망이 따른다. 무언가를 추구하되 설령 안 되더라도 실망하지 않는 법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A : 왜 사니?
B : 죽으려고..
A : ???
삶의 최종적인 결론이 죽음이기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삶이란 살아가는 그 자체 즉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빅터 프랭클 박사의 말이 있다. “내가 삶에 무언가를 기대하기보다는 삶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아마도 프랭클 박사도 삶에 대해 기대할 바가 없다는 걸 알았나 보다. 하지만 삶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부정적이거나 좌절하고 포기하는 나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