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 박노해 시의 변화

by 장용범

박노해라는 시인은 꽤나 오랫동안 익숙한 시인이었다. 80년대 대학시절 그의 시 ‘노동의 새벽’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과 함께 운동권 학생들이 즐겨 애송하는 시였고 수시로 전단지에 인용되는 시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의 시에 대한 오해가 있었나 보다. 서정적이기보다는 그냥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여 읽기에 좀 거북한 시의 성향일 것 같았다. 아내가 서촌의 어느 카페에서 박노해의 안데스 사진전을 보고 구입했다는 두툼한 박노해 시집의 시는 그래서 좀 의외였다. 지난 정부 시절, 대부분의 586 운동권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현실 정치에 참여했지만 박노해만큼은 자신의 역할은 여기 까지라며 더 이상의 미련을 버리고 멀리 남미의 안데스 산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야말로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난 자의 뒷모습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 후 촛불 혁명으로 일어난 586 정치세력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큰 실망감을 안겨 주고 비난받을 때 그는 안데스가 있는 남미의 어느 나라에서 삶의 질곡에 고통받는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을 했나 보다. 그 자체로 멋진 시인의 모습이었다. 최근 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시가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라는 제목의 시이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밤하늘에 별은 뜨고

계절 따라 꽃은 피고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나는 나의 일을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길을 뚜벅이처럼 갈 수 있는 사람은 내면이 참 단단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행색이 어떠하든 어떤 에너지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에너지는 일부러 가지고 싶어 가진 게 아니라 그냥 생겨난 것이다. 고양이가 꼬리를 잡으려 빙빙 돌 때는 꼬리가 잘 안 잡히지만 그냥 자신의 길을 가면 꼬리는 조용히 따라오듯 말이다. 그렇다. 그런 삶을 살면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 필요한 인정은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수용하는 자기애일 것이다. 밖으로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몄더라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장식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산다는 건 의외로 간단한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당당한 삶을 살아가면 되니 말이다. 박노해의 시를 읽으며 이제 그에 대한 나의 편견을 거두어야겠다. 그는 이제 삶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시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참고>


노동의 새벽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 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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