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다. 이런 날은 가만히 있어도 온 몸이 나른한 게 효율이 나지 않는다. 그저 잠이나 푹 자고 일어나면 개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장마가 시작되려나 봐요.” 직원의 말에 돌아보니 매년 장마가 이쯤 시작된 것도 같다. 비가 좀 내리긴 해야 한다. 지금 가뭄이 아주 심하다는 것을 매일 농사 지으시는 법륜 스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2년 전 은퇴한 전임자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퇴직 1년을 남겨두고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며 퇴직 후를 대비해 많은 준비를 했던 분이었다. 궁금했다. 그렇게 준비했던 자격증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나 싶어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집에 그냥 계시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막연히 준비했던 것들은 별 쓸모가 없던 경우가 많았다. 그런 분야는 더 간절한 사람들이 채워가게 마련이다. 그가 준비해서 취득한 자격증은 주택관리사, 공인중개사 등이었다. 또 무슨 자격증을 취득했던 것 같은데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퇴직 1년을 남겨두고 서너 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깔끔하게 퇴직하신 선배였다. 전화로 근황을 물으니 역시나 그냥 집에 계시다고 했다. 자격증 이야기를 했더니 지금 시기는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니 그냥 집에 있는 것이 퇴직금 잘 보전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도 문을 닫고 있는데 자격증 하나 취득했다고 섣불리 뛰어들 수는 없는 환경이긴 하다. 그런데 꼭 맞는 말도 아닌 것 같다. 그간 30년 넘도록 직장에 매여 있었고 이제야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을 텐데 매일 집에만 있기에는 좀 답답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오랜만의 내 전화가 반가웠는지 제법 오랜 시간 통화를 했다. 조만간 한 번 모시겠다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미래를 준비하는 데 있다. 가끔 개미 같이 군집생활을 하는 곤충이나 겨울잠 자는 동물에게서도 그런 면이 보이지만 인간과 비할바는 아니다. 물론 이런 근심과 걱정 때문에 미래를 더 철저히 준비했던 면이 있다. 이는 유목에서 농경 정착으로 이어진 인류가 문명을 꽃피우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는데 다른 동물들은 하지 않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그것이다. 그 선배님의 자격증 준비도 그랬던 것 같다. 비록 1년 정도 남겨두었지만 몸은 아직 현직인데 마음은 은퇴 후에 가 있는 상황에서 그냥 불안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의 나도 그때의 선배님과 같은 상황이다. 다른 점은 은퇴 후 새로운 밥벌이를 위해 지금 무언가를 준비하기보다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로 제쳐두었다는 것이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오늘 여기에 앉아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을까 싶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좋은 방법이 뭘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사례를 찾는 일이다. 나에겐 처음으로 가는 길이지만 먼저 갔던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전례가 없다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전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못 찾았다는 것이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고 있고 다만 시대에 따라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하늘의 태양은 동에서 떠서 서로 지고 있고 별들은 반짝인다. 생로병사, 생주이멸은 반복적인 세상의 섭리이다. 전례는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꼭 맞지는 않더라도 유사사례는 있게 마련이다. 다만 그것을 참고 삼아 행동을 하냐 마냐의 문제라고 본다. 은퇴 후 삶은 내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이다. 이런저런 선배들의 사례를 보면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생활도 모두 다른 것 같다. “65세가 되니 은퇴 후 돈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아. 매월 국민연금 받는 것도 남는 편이야. 그런데 심근경색으로 수술받고 나니 자신감이 줄어들고, 어머님이나 자식, 아내와의 관계가 골머리 아파지더군. 은퇴 후의 삶은 좀 복합적인 것 같아.” 내가 좋아하는 은퇴 하신 옛 상사분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