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 ( )에서 살아보기

by 장용범

여행도 나이에 따라 패턴이 달라지나 보다. 40대 초반까지는 타지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 돌아다니기를 즐겼던 반면 나이가 들수록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머무는 여행을 원하게 된다. 이제 새로운 걸 보는 것보다는 외지의 한 곳에 머물며 여행기간 내내 낯설지만 익숙한 일상 속에 머물다 오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강릉에서 살아 보기’라는 책은 제목부터 확 끌렸던 테마였다. ‘( )에서 살아보기’라고 할 때 ( ) 안을 채울만한 내가 국내에서 살아보고 싶은 곳은 어디가 있을까?


1. 강릉

강릉에 대한 이미지는 깨끗한 동해바다와 조용하지만 품위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이미지가 떠오른다. 고향이 부산이라 그런지 가끔 바다를 보아야 활력을 받는다. 그것도 눈에 걸리는 바 없이 탁 트인 수평선의 바다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이는 동해 바다는 보기에 좋으나 가까이할 수 없는 미인이고, 서해 바다는 갯벌도 많고 수심도 얕아 친근한 애인이나 아내에 비유했는데 적절한 표현 같다. 주변에 강릉에 세컨드 하우스를 장만했다는 분들이 더러 있다. 강릉은 서울에서 2시간 정도면 도달할 정도로 접근성도 좋아 좋은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젠 강릉의 집값도 많이 올라 점점 부담스러운 지역이 되었다. 마음 한 켠에는 여전히 강릉살이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비록 강릉에 집을 갖지는 않더라도 100일 살아보기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2. 경주

경주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기차 타고 갔던 수학 여행지였다. 도심 곳곳에 있는 능들과 기와집들을 보면 이 도시는 마치 신라 시대 어느 시점에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고즈넉한 느낌이 좋다. 고요한 달빛 아래 천년고도를 거니는 체험은 꽤나 낭만적일 것이다. 게다가 바다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문무왕 해상릉이 있다는 감포에 가면 시원한 동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니 그 매력이 더 할 것 같다.


3, 함양

함양은 30대 시절 잠시 근무했던 거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은 지리산 자락이어서 군데군데 풍광 좋은 곳에 정자들이 많은 곳이다. 비 오는 날 옛 선비들처럼 정자에 앉아 가야금 한 곡조 듣는다면 그 분위기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이다. 함양읍에는 상림숲이라는 곳이 있는데 신라시대 최치원이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인근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인공 숲이라고 한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평지의 상림숲은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함양은 수동 메기탕을 떠올리게 하는데 언젠가 경기도 김포에 갔을 때 메기탕 맛이 함양에서 먹은 맛과 비슷해 주인에게 이야기했더니 서로 형제간이라며 반가워했다. 나도 함양의 맛을 김포에서 느낄 줄은 몰랐다.


4. 부산

나의 고향이다. 나고 자란 곳이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는 여태 살아보지 못한 곳이다. 그게 벌써 30년이 넘었다. 부산 자체도 아름다운 도시지만 부모님이 연로하시니 은퇴 후 가끔 부모님과 지내다가 내가 운전하는 차로 두 분을 모시고 가까운 곳에 여행이나 할까 싶다. 아내도 가장 현실적인 살아보기 여행이라고 하는데 부모님 집의 남는 방에 머물며 바다가 보고 싶으면 지하철 타고 광안리나 해운대 바닷가에 가면 되고 사람이 그리우면 형제나 지인들을 만나면 된다. 은퇴 후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살아보기 여행이다.


5. 국내 1,000 Km 여행하기

살아보기 여행은 아니지만 최근 사회서 만난 선배로부터 알게 된 여행 방식이다. 서울에서 퇴근 무렵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여수로 내려간다. 밤 11시쯤 도착하면 여수 밤바다를 즐기다 해장국 한 그릇 먹고는 새벽 한 시쯤 여수에서 제주로 출항하는 여객선을 탄다. 배에서 1박을 하는데 바다에서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을 배에서 볼 수 있다. 아침에 제주항에 도착해 역시 해장국 한 그릇 먹고는 제주도 시티투어 버스를 탄다. 하루 동안 제주도를 한 바퀴 돈다. 중간중간 내려 구경하며 보내다 저녁에 제주 공항에 도착해 식사를 하고는 20시쯤 서울행 비행기를 탄다. 김포에 도착하면 21시, 집에 도착하면 22시 정도로 1박 2일의 1,000킬로미터 여행이 마무리된다. 한 번쯤 해볼 만 한데 몸은 좀 피곤하지 않을까 싶다.


살아보기 여행은 많은 것을 보지는 못해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다. 이제는 더 많은 것을 보는 양적인 여행보다는 한 곳에 머물며 사람들의 일상이 익숙해지는 깊이 있는 여행을 하고 싶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서 나는 여행의 또 다른 묘미를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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