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중생들의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욕망(탐), 성냄(진), 어리석음(치)을 들고 있다. 세 가지 독이라는 뜻인데 법륜 스님은 이를 수행 정진의 목표에 대비시키셨다.
“우리가 수행 정진을 하는 데 있어서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의 욕망에 끄달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둘째, 자기의 성질에 끄달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셋째,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욕망도 없고 성질대로 살지도 못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자. 뭔가 밋밋하고 재미도 없을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욕망을 추구하고 성질대로 살고 있다면 그에 따른 괴로움은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했다. 결국 선택은 두 가지다. 수행이 깊어 욕망이나 성질에 끄달리지 않는 수준이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욕망을 추구하고 성질대로 살아가되 괴로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별로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말들을 한다. 이들은 욕망이 사라진 도를 통한 경지일까? 아니다. 이들은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경우이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해도 안 되니 정신적 도피처로 돌아간 상태이다. 뭔가를 하려 들면 힘들고 괴로우니까 처음부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걸로 하면 성취는 없지만 실패도 없는 상태가 된다. 그것도 아니면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자기 결정권이 없는 경우이다. 일종의 노예 같은 경우일 수도 있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어느 순간 뭔가를 스스로 하고 싶은 게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런 것을 욕망에 끄달리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
명리학을 좀 아는 분이 해 준 말이다. 운 때에 맞추어 산다는 것을 밀물과 썰물의 때를 안다는 것에 비유했는데 운에 맞게 사는 사람은 밀물 때는 조용히 기다렸다가 썰물 때 바다로 나간다고 했다. 헤엄을 아무리 잘 친다고 해도 밀물이 들어올 때는 바다로 나가기 어렵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들이다. 많은 아시아 지역을 점령할 정도로 힘이 강했던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게 될 거라고 믿었을까? 폭압적인 군부독재에 맞서 돌멩이 하나 던진다고 민주화가 된다고 생각했더라면 그는 과대망상증의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이런 류의 사람들 같다. 그 일이 되든 안 되든 지금 해야 할 일이라서 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것의 결과보다는 지금의 과정에 충실한 사람들이 진정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욕망에 끄달리고, 자기 성질에 끄달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중생들은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성향들이니 나의 삶이 그리 살고 있다면 괴로운 게 당연하다는 태도라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