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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

by 장용범

지난주 귀국한 일행과는 떨어져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한 주 더 머물렀던 지인이 귀국을 했다. 집이 청주인데 바로 가는 것보다 서울서 하루 놀다 가라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한다. 그는 나 보다 네 살 아래지만 아직 싱글이라 몸도 마음도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이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2019년 블라디보스톡에서다. 당시 현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던 그는 밀려드는 국내 여행객들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사업을 크게 했던 사람이었다. 의협심이 강하고 굵직한 목소리에 좌중을 압도하는 듯한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라 여겼는데 그 후 여러모로 사업에 불운이 겹쳐버렸다. 코로나로 여행의 수요가 뚝 끊어져 버렸는가 하면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재기의 희미한 가능성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이라곤 12인승 요트 하나가 전부라는데 그것도 그냥 현지인에게 임대로 주었다고 한다. 다시 기회를 탐색 중이라지만 이제 50대의 나이에 정말이지 쉽지 않아 보인다. 일요일 오후 북촌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더운 오후지만 에어컨 아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남자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참석한 분들이 어느 정도는 유라시아 지역과 연관된 분들이라 자연스레 그 지역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중 사할린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는데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러시아내에서도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불리기를 거부한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대륙으로 나갔던 고려인들이 자발적 이주였다면 사할린 동포들은 일본에 의한 강제이주의 경우가 많았다. 지리적으로는 고려인들이 한반도의 북쪽 출신이 다수인 반면 사할린 동포들은 경상도, 전라도 등 남쪽 사람들이 많다. 해방이 되고 사할린에 남겨진 이들은 당연히 조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으나 소련이 점령한 땅에서 무국적자로 남겨지게 되었다. 소련의 입장에선 자국민이 아니니 국적을 주지 않았고 그들은 일본인도 아니었다. 해방 후 조국은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사할린 동포들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사할린에는 강제이주뿐 아니라 돈을 벌 기회의 땅으로 보고 자발적으로 넘어온 사람들도 많은데 이들까지 섞여 아주 복잡한 동포사회가 되고 말았다. 남녀 성비는 90%가 남자, 10%가 여자로 극심한 성비 불균형을 이루었는데 남자들 대부분은 벌목이나 광산에서 일하다 보니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소련 체제에서는 자연스레 사회주의 성향이 더해지니 여성들의 권리가 더 우월해져 사별에 더해 남자들이 이혼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배경으로 사할린은 성적 자유도가 상당히 높은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무국적자인 그들은 소련의 정규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는데 정부의 인가가 없는 자체 교육을 받았지만 대학에는 갈 수가 없었다. 여기에 북한이 대학 교육을 제공하니 2세대 사할린 사람들 중 똑똑한 이들은 김일성 대학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소련은 사할린의 한국인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려인들을 투입했는데 여기서 지배층인 소련 국적의 고려인들과 사할린 동포 간의 갈등이 조장되었다. 이후 소련 체제가 무너지고 한국의 북방진출이 활성화되자 한국어를 할 줄 알았던 사할린 동포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는데 지금은 사할린을 넘어 블라디보스톡까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진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1세대는 거의 돌아가시고 2-3세대들로 이어지는데 고려인이나 사할린 동포들이나 한국은 그저 경제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나라 정도이지 1세대만큼 강한 애착을 가지는 대상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오랜 분단과 이데올로기적 경계로 마음의 국경이 남아있다. 남한과 북한 주민들, 사할린 동포들 외에 얼마 전 키르기스스탄에서 만난 고려인 김 유리, 박 아르뚜르 씨는 스탈린 시절 강제 이주한 후손들이다. 한반도를 지정학적으로 보면 중국의 조선족, 재일동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흔적이라면 재미교포, 독일 파견 광부와 간호사, 호주 등 세계 곳곳에 있는 교포들은 경제발전 시기에 기회를 찾아 떠난 자발적 이주가 많았다. 정주 배경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나라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사람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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