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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무소의 뿔처럼 가라

by 장용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저녁, 조용한 사무실에서 한 해를 돌아본다. 아니 나의 직장 생활 전체를 돌아본다. 엊그제 발표된 인사는 이미 예상한 결과였다. 승진은 불가, 사무소장으로는 임명. 직장생활의 꽃은 승진이라고 하지만 수년 전의 업무상 징계조치와 상반기 부진에 따른 인사조치는 현 직장에서 도달 가능한 나의 위치를 정해버린 것 같았다. 그동안 동기나 선배들을 제치고 참 잘도 올라왔는데 골프로 치면 후반부에 벙커에 빠진 셈이다.

작년부터 현장의 어려운 상황을 간신히 끌고 왔었지만 올해 코로나는 나에게 마지막 카운트 펀치를 날리고 말았다. 퇴사를 고민할 정도로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그래 여기까지 잘 왔는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얼마 남지 않은 정년까지 끝까지 가보자였다. 하지만 그동안 스스로 잘 났다 여기며 달려온 내 자존심에 난 스크래치와 나를 보는 주변인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나에게는 이처럼 개인적인 고민거리가 있으면 찾아뵙는 인생 선배분이 한 분 계신데 오래전 은퇴하신 본부장님이다.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려주신 당신의 조언은 이러했다.

직장생활 중에는 그 세계가 전부인 것 같지만 막상 퇴직을 하고 나면 그 사람 예전에 어디 근무했다는 것만 남지 어디까지 올라갔다는 것에 관심 두는 사람은 없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게다가 넌 직장생활 중 하고 싶은 것을 웬만큼 다 하면서 지내지 않았더냐. 그리고 남의 시선은 더더욱 별 것 아닌데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기도 벅찬 상황이라 남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슈가 생기면 잠시 회자되는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남의 일은 연못에 작은 돌 하나 던진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덤덤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남들이 자기일 제쳐 두고 너를 생각할 정도로 네가 그리 대단한 인물은 아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나 스스로 잘 났다고 생각했었고 직장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보는 나의 실체는 시간과 노동을 팔아 회사로부터 돈을 받는 여러 노동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당연한 깨달음이 내 마음을 이상하게도 편하게 받쳐 주었다. 그래서 나의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긍정적이란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무조건 좋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음은 내 마음을 좀 편하게 한 긍정적 발상의 전환이었다.

첫째, 자, 지금부터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생각하자. 30년 정도 다녔으니 그만 둘만도 하다. 그런데 내가 아직은 일을 할 여건은 되니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는데 지금의 회사가 얻어걸린 거다. 근무기간은 2년 정도의 계약직인데 조건을 따져보니 급여와 복지 등 정말 대단한 대우를 해주는 곳이다. 마다 할 이유가 없다. 정말 이 회사가 감사하다.

둘째, 회사와 나는 고용과 노동의 계약관계로 생각하지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엄연한 사실인데도 이게 처음에는 참 이상했다. 그동안 나는 그 이상의 뭔가를 일과 직장에 투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일과 나를 분리해서 바라본다. 일은 직장에서하면 족하고 나머지 시간은 일과 무관한 나의 시간을 가지자. 여기에 투여된 것이 글쓰기와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관심이라는 테제였다.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12월도 일주일 정도 남겨두었고 주변의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돌아보면 어렵고 힘든 한 해가 될 수 있었지만 그런 발상의 전환 덕에 개인적인 성과들은 나름 거둔 것으로 올 한 해를 평가해 본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바꿔 볼 일이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만 혼자 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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