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싶었다. 서울에서 여수로 무궁화 열차를 타고 가서 여수에서 제주 가는 밤배에 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어두운 밤바다를 달리던 배가 제주에 다다를 즈음 먼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돋이를 직접 보고 싶었다. 마침 대학원 원우들과 졸업여행을 겸한 제주에서의 만남을 갖기로 해 그간 품었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퇴근 후 빠른 것만 찾는 현대인의 성향을 거슬러 느린 무궁화 기차에 올랐다. 기차 여행 중에 읽을 책은 최근 발간된 김훈의 ‘하얼빈’이란 소설이다. 대련, 봉춘을 거쳐 중국의 철길을 따라 하얼빈으로 오는 이토와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가는 안중근의 행적과 심정을 김훈 특유의 디테일한 묘사로 써 내려가는데 내가 탄 야간열차의 진동 속에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기차의 느린 속도에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 같았는데 웬걸 영등포를 지날 무렵 이미 만석이 되었다. 그러다 수원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내리고 기차는 점점 가벼워졌다. 퇴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기차는 익숙한 이름의 역마다 모두 정차하더니 이젠 빠른 고속열차가 지나야 한다며 하나뿐인 철길을 양보까지 했다.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 빠른 기차를 타면 그만큼 이용을 덜 했으니 요금을 덜 내는 게 맞다는 시골영감과 역무원 간의 실랑이를 묘사한 이야기였다. 느린 기차를 타보니 과정을 중시했던 영감님의 말도 맞고 빠른 결과에 중점을 둔 역무원의 말도 맞다. 모두가 속도를 이야기하고 결과를 두고 잘했니 못했니 할 때 나는 느린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과정에 충실한 교통편을 이용한 셈이다. 제주 여행을 일정보다 일찍 시작한 일행들의 사진이 SNS에 속속 올라온다.
어스름한 저녁에 서울서 출발한 기차는 자정이 넘어서야 여수역에 도착했다. 이 노선은 여수가 끝이다. 철길의 끊어진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게 흥미롭다. 계속 이어질 것 같지만 언젠가 끝나 버리는 우리네 인생과 닮아 보인다. 멀리 제주로 가는 골든 스텔라호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저 큰 쇳덩이가 물에 떠 있는 게 신기하다. 늘어선 승용차나 화물차들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는 짐승들 마냥 고분고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제주라는 섬의 특성상 육지에서 어찌 사람만 건너가겠는가. 여객선은 엔진 소리만 아니면 배를 타고 간다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안정적인 항해를 하고 있다. 혼자의 여행에도 분위기를 내고 싶어 가방만 던져두고 선상으로 나왔다. 서울서 맡지 못한 오랜만의 바다 내음이 향기로웠다. 그렇게 밤바다를 보다 들어와 잠이 들었다.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해 뜨는 시간에 맞춰 둔 알람이었다. 가벼운 세수를 하고는 아예 가방을 챙겨 선상으로 나왔다. 해는 늘 그렇듯 정해진 시간에 뜬다. 멀리 동녘 바다가 서서히 붉어지더니 마침내 영겁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 바람을 맞으며 보는 선상 해돋이는 처음이다. 하지만 해돋이가 아니라 사실 지구가 한 바퀴 돈 것이란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만 끄달리다 보니 해는 산에서 뜨고, 바다에서 뜨고 그리고 빌딩 속에서도 뜬다. 정해진 모습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해돋이가 이루어지니 진정 대인배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