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희망과 스톡데일 패러독스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어느덧 10월이다. 어제는 부고를 한 통 접했다. 지역 문인회에 속한 어느 시인의 죽음이었다. 함께 운영진의 일을 맡아 하셨는데 평생을 국어 교사로 근무하다 정년퇴임 하신 분이었다. 향년 74세로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백일장 심사까지 하셨던 터라 갑작스런 부고에 잠시 당황했다. 문인협회 이름으로 근조화환을 조치하고는 자체 조문단을 꾸렸다. 평생을 대구에 계셨는데 부부의 상경 이유가 자녀들의 육아를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낯선 곳이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르치고 글쓰는 재주 밖에 없어 자연스레 문인회에 가입해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셨다며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던 분이다.
죽음 나이로 74세는 이른 나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한 사람이 생을 마무리 짓기엔 적당한 나이로 보인다. 내가 죽음을 맞고 싶은 나이도 75세 정도이다. 주변에 고령의 연세로 고통받는 노인들을 보니 오래산다는 것에 거부감이 든 탓이다. 육신이 고통과 짐으로 여겨질 때 죽음은 자연이 주는 마지막 선물 같다. 죽음 나이 75세의 주변을 둘러보면 자녀들은 40대 정도로 사회 생활이 어느정도 무르익은 상태이고, 본인도 은퇴 후 평온함을 누리다 육체가 더 힘들어지기 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나이같다. 물론 의미없는 바램이긴 하다. 내가 태어날 때를 몰랐듯이 죽을 때를 어찌 알겠는가?
사실 언제 죽을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심리학 용어에 스톡데일 패러독스라는 것이 있다. 베트남전에서 포로로 잡힌 스톡데일 중령이 7년 6개월 만에 생환한 것을 두고 붙여진 이름인데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희망은 더 큰 절망을 부른다는 의미다. 그가 갇혔던 수용소는 열악한 환경으로 악명이 높아 포로들 대부분은 1-2년 안에 사망에 이르렀다. 그런데 7년 6개월이나 버틴 그의 심리상태에 학자들은 주목했는데 그가 현실을 대하는 마음이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았기에 그게 가능했었다는 결론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는 부정적 사고를 가진 이는 당연히 죽어 나갔지만 낙관적이고 긍정적 사고를 가진 이들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풀려 날거야‘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이들은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더 큰 절망을 했고 이는 죽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스톡데일 중령은 달랐다. 현실을 직시했지만 방향성은 유지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석방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석방되어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일 때 그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 적응하며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 후 벌어진 상황들을 보면서 스톡데일 패러독스를 적용해 보자. 일단 뉴스를 좀 멀리하고 내 주변에 직접 일어나는 일들에 주목한다. 좋은 일은 좋은대로, 나쁜 일은 또 그런대로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자. 그리고 누구에게나 주어진 마지막 희망(?)의 말은 이렇다. ‘나는 오늘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 달 후 죽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