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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용범 Jan 02. 2023

674. 마지막 근무일지

07:30

집을 나선다. 출근길 배웅을 하는 아내와 인증샷을 하나 남겼다. 결혼 이후 한결같이 출근길 배웅을 해 준 아내였다. 마지막 출근길 배웅이니 인증샷을 하나 남길만도 했다.


08:00

아직 사무실은 어두웠다. 전날 짐을 정리한 두 박스 중 하나를 자동차 트렁크에 싣는다. 다른 하나는 2월에 앉게 될 책상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는 스타벅스에 가서 직원들을 위한 커피 캐터링을 주문했다.


09:00

부서 직원들에게 커피 돌린다는 공지를 하고는 출근하는 서무에게 스타벅스에 들러 줄 것을 요청했다. 커피가 도착하고 사무실에 직원들 웃음소리와 커피향이 가득하니 분위기도 한결 UP 되는 것 같다.


10:00

마지막 날이라 근태결재만 하면 되리라 여겼는데 몇 가지 결재 할 게 남았나 보다. 이제 네모칸의 결재란 보는 일도 드물겠지 싶어 마지막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적어본다.


11:00

같은 건물에 근무하는 입사 동기에게 잠시 들렀다. 친구는 호적이 67년 생이라 내년도 은퇴 대상이다. 올해 본사 사업부장을 처음 맡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금번 명퇴 신청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얼굴도 많이 상한 것 같다. 부서의 일은 마음대로 결정 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못한 현실과 아래에 치이고 위에 치이는 중간책임자로서의 고충을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충분히 공감되는 내용이다.  


12:00

직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직원들은 2월 달에 다시 올 사람이 마지막인 것 처럼 코스프레 하다고 놀려댔다. 식사 중 아내로 부터 창원에 가야 할 기차 시간이 빠듯하다는 연락이 왔다. 12:50분 기차였다. 양해를 구하고 식사 중 먼저 일어섰다.


13:00

다행히 넉넉하게 시간을 맞추어 기차에 올랐다. 오늘은 내가 오랜기간 근무했던 경남에서 입사동기들의 은퇴를 기념하는 연찬이 잡혀있는 날이다. 경남을 떠난지 1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모임의 자격을 유지한 것은 선후배들과 동기들의 끈끈한 우정을 차마 못잊어서다.


16:00

처가가 있는 창원에 도착했다. 집안이 조용하다. 혼자 계신 장인께서 딸과 사위를 맞아 주셨다. 새삼 아이들과 어른들로 북적이던 신혼 때가 생각났다. 아내의 출산 후 처가가 있는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했고 장모님은 막내 딸을 위해 손녀들의 육아를 적극 도와 주셨다. 내가 회사에 출근하면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출근하던 시절이었다. 아내는 지금도 자신의 리즈시절을 그때라고 이야기 한다. 부모님은 60대라 여전히 젊으셨고, 큰 오빠네 가족과 어린 조카들, 언니네 가족까지 집안이 늘 북적이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의 독립으로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가족이란 존재도 늘 함께 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시절 인연인 것 같다. 90대의 장인어른께 건강을 여쭈니 너무 오래 살았다는 말씀만 하신다. ‘너무 오래 살았다’는 말씀에 인생의 짙은 허무감마저 느껴진다.


18:30

모임 장소에 갔다. 반가운 동기들의 얼굴이 여럿 보인다. 입사 때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고 이제는 머리 빠지고 백발성성한 중년 아저씨들 모습이다. 내 모습도 그렇겠지. 후배들이 꽃다발과 전별금을 준비했다. 전별금은 봉투만 받고 내용물은 그대로 모임 발전기금으로 전달되었다. 화기애애했다.


22:00

후배들을 보내고 은퇴하는 동기들끼리 찻집에 갔다.이제는 2차 술자리도 부담스러울 나이다. 은퇴 하더라도 분기에 한 번 정도는 보기로 한다. 서울에 사는 내가 걸리는지 의향을 묻기에 당연 참석이라고 일러두었다. 다만 골프 모임의 분위기라 골프에 관심없는 나로서는 최소한 식사자리 정도는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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