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건설, 440억 물어내고 시공권 포기’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기사에는 부동산의 침체니 뭐니 하지만 정작 내 눈에는 저런 의사결정이 있기까지 내부에서 얼마나 치열했을까 싶었다. 그리고 더 궁금한 것은 저 결정으로 치명상을 입을 직원들은 과연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회사 안에도 엄연히 정치가 존재하고 회삿돈이 개인 돈이 아닌 이상 440억 손실에 대한 책임 문제는 대두될 것이다. 지금은 당장 수면 위로 부각되지 않더라도 관련자들의 인사상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경우를 떠 올려 보자. 은행에서 아파트 PF 대출을 일으켰다. 보통 중도금, 잔금 대출까지 이어져 나중에 완공된 아파트를 담보로 잡는 별 무리 없는 사업이다. 지금까지 나간 대출 규모가 500억 정도인데 코로나로 시공사가 중간에 부도나고 새로운 시공사는 인건비, 자잿값 상승을 들어 공사비를 더 올려달라고 한다. 분양을 받은 사람들은 당장 목돈이 없으니 은행에다 대출 증액을 요구할 것이다. 이 경우 은행은 어떻게 해야 할까?
1. 대출 금액을 증액한다. 문제는 완공된다 해도 대출액이 담보가액을 초과할 수도 있다. 최근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더 한다.
2. 추가 대출은 불가하다. 시공사가 요구하는 증액분은 시공사와 분양받은 사람들의 문제라고 선을 긋는다. 문제는 추가 대출을 못 받으면 기존 대출금도 못 갚을 사람들이니 은행은 고스란히 중도금 대출의 부실도 우려된다.
은행으로 봐서는 참 어려운 문제 같다. 하지만 은행원에겐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두 가지 중 하나만 하면 된다. ‘첫째, 규정대로 한다. 둘째,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이다. 다만, 나중에 부실에 대한 책임으로 나까지 엮일 것 같으면 역시 규정을 들어 거부한다. 당장은 윗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질 수도 있겠지만 평생 볼 사람도 아니고 그 역시 힘없는 직장인에 불과하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준다. 결론은 시공자, 분양권자, 은행의 손실 가능성은 모르겠고 나는 규정대로 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 설령 500억이 다 부실 나더라도 나중에 감사를 받을 때 은행 손실을 왜 줄이지 못했냐기 보다는 규정 위반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은행을 소유한 은행가가 아니라 은행원이라는 사실이다.
은행 대리 시절 다시는 상종하기 싫은 지점장이 한 사람 있었다. 지점 대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리하게 사채업자, 경매업자와 손잡은 사람이다. 당시 대출을 맡고 있던 나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이상한 담보 물건을 딱 규정에만 맞게 들고 와 대출을 지시했다. 누가 봐도 부실 가능성이 높은 물건들이었다. 때로는 부딪히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차장이 하루는 나에게 술 한잔하자더니 이런 말을 했다. “보다 못해 하는 말인데 네가 다치지 않을 만큼 딱 규정대로만 해라.” 조만간 부실 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되묻자 “안다. 하지만 규정에도 맞고 지점장이 하겠다는 걸 네가 무슨 수로 말리겠냐"라고 했다. 당시에는 중간 책임자이면서 지점장의 전횡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 그 사람이 참 비겁해 보였다. 하지만 규정대로 하면 회사는 손실 나더라도 너는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회사 생활은 일에 대한 주인의식은 가지되 주인은 아니라는 명확한 선을 긋는 게 현명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