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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 내가 남겨야 할 유산

by 장용범

“그동안 사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 저희도 잘 살겠습니다.”


장례지도사가 장인의 유족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하라기에 했던 말이다. 인생고(人生苦), 이 땅에서 91년 동안 사시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으셨던가. 그나마 전반부보다는 인생 후반부가 편안하셨으니 다행이지만 요양원에 계신 당신의 아내와 생이별을 했고 코로나로 인해 가끔 찾아가는 요양원에서도 먼발치서 아내의 모습을 봐야 했으니 그게 마음 아팠다. 일제강점기도, 전쟁도, 여러 내란도 겪었으나 마지막에 전염병으로 이런 일을 겪으리란 상상이나 하셨을까? 붓다의 말씀대로 사는 게 괴로움이라는 인생고(人生苦)는 참으로 적절한 표현 같다. 이제 그 괴로운 생을 마감하셨으니 편안하실 일만 남았을 것이다.

2시간 정도 화장을 마치고 수골 과정을 지켜보았다. 관짝이 있었던 베드 위에는 별게 없었다. 수골하는 이가 남은 잔해를 쓸어 담아 믹서기에 넣었다. 잠시 윙하는 소리가 지속되더니 이내 곱게 갈린 뼛가루를 종이에 싸서 건네준다. 한 인간이 남긴 육체의 마지막 흔적이다. 장인의 뼈를 건네주는 수골실 안의 담당자 얼굴을 보았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하루 종일 남의 뼛가루 빻는 일을 업으로 삼았으니 새삼 밥벌이의 위대함을 느낀다. 한 사람이 생을 마칠 때 남긴 뼛가루는 사소한 것이다. 뼛가루 자체로 무슨 큰 가치가 있겠는가. 유족이 아니라면 거저 줘도 받지 않을 인간의 잔해들이다. 나에게는 장인어른의 음성, 미소, 마음을 느꼈던 그 시간들과 기억들이 소중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인간이 살다간 진정한 흔적이다.

법륜스님에게 질문한 한 외국인이 있었다. 딸을 오랫동안 키워왔는데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자신의 유전자가 아니었다며 괴로워하는 사연이었다. 불교에는 이런 계송이 있다. “한 생각 일어나니 만법(萬法)이 생겨나고, 한 생각 사라지니 만법(萬法)이 사라진다.“ 스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다.


“딸의 DNA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너는 누구였고, 그 후의 너는 누구인가? 어떤 것이 진정한 너인가?”

이것은 전통적인 선(禪, Zen)의 질문입니다. 왜 말 한마디에 사람이 정반대로 바뀝니까? 왜 말 한마디에 내 딸이 아닌 게 됩니까? 그럼 도대체 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사자에겐 분명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20년 넘게 애지중지 키워 온 딸인데 알고 보니 내 유전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웬만한 멘탈이 아니고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차라리 끝까지 모르고 지냈으면 마음이나마 편했을 것이다. 좀 오래된 경우지만 법률 일에 종사하는 한 사람이 자식들 유전자 검사를 따로 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본인 말을 빌면 가진 것도 제법 많은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유산 상속을 대비해서 그랬다는 얘기를 듣고는 이해는 가지만 저 사람 마음은 과연 편안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장인어른이 남긴 것이 뼛가루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했던 시간과 좋았던 기억들이듯이 유전자가 다른 딸을 가진 아빠의 경우는 어떨까? 이제 유전자가 다름을 알았으니 지난 시간 아빠로서 딸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웃고 울며 감동했던 그 시간들이 다 부정되어야 할까? 그러기엔 자신의 삶이 너무 허망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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