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은퇴 후 계획대로 되지는 못했지만
은퇴 전에 대륙 여행에 대한 야무진 꿈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며 중간의 기착지에 내려 보고 또 가기를 반복하여 모스크바까지 가는 여행을 꿈꾸었다. 적어도 작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러시아로 가는 하늘길이 막히고 국내 정권도 바뀌면서 양국이 거의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생겨나니 그런 마음도 점점 위축되어 갔다.
그러다 은퇴와 동시에 순회 검사역을 지원했는데 이번에는 강릉의 바닷가에서 글도 쓰고 출장도 다니는 상황을 그리며 출장지로 강원, 제주 지역을 원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강원 지역에 지점 수가 워낙 적다는 이유로 영남권으로 변경되었다. 이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나의 은퇴 이후 계획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서 생활하면 된다 싶어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제 부산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매일 아침 헬스를 마치고 오면 두 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이런저런 하루 일정을 마치면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된다. 별도의 사무공간은 없지만 직장인들 퇴근시간에 맞추어 퇴근을 한다. 가능하면 두 분과 저녁을 함께 하기 위해 일찍 귀가하는 편이다. 그런데 두 분은 이런 아들과 함께 하는 이 생활이 너무 좋으신 것 같다. 내가 오기 전에는 두 분이 별 외출도 없이 집에서 지냈는데 매일 들락날락하는 사람이 생겨 생기가 도는 것 같다고도 하신다.
하루는 어머니가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 지극한 불교신자인 어마님은 부처님께 간절히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지니고 계신다. 종교로서의 불교를 믿는 어머님이시다. 하지만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는 기복성 종교가 아님을 알기에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 “어머니, 기도는 이루어질 때도 있지만 안 이루어질 때도 있어요.”라고 하니 아들의 말이 못내 서운하신가 보다. 그래서 “하지만 원하는 대로 안 되었다고 해서 꼭 안 좋은 것도 아니에요”라고 했다. 나는 그런 생각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은퇴 후 대륙 여행을 떠났거나 강릉에 집을 얻어 동해안의 바닷가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은퇴 후 이처럼 두 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좋은 것이다.
세상 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 어제도 직장 후배와 이야기 중에 아이들 취업 걱정을 하기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은 걱정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다. ‘걱정을 해서 걱정할 일이 사라지면 걱정할 일이 없겠네’라는 말이 있다.
학창 시절 공부 잘하는 우등생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계속 앞서갈 것 같고 반에서 한참 뒤처진 아이들은 영원히 루저로 살 것 같지만 인생사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살아보니 그렇다. 그러니 원하는 바는 있고 그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은 좋지만 설령 뜻대로 안 되었다고 실망하고 좌절할 일은 아니다. 어쩌면 내가 지금 보지 못하는 보물이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야말로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가 맞는 말이다. 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좋은 것을 주님께서 준비해 두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사는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