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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좀 재미난 일 없을까?

by 장용범

지난 주말 중국 차모임에 갔다가 좀 특이한 분을 만났다. 비혼으로 혼자 사시는 분인데 책과 중국 차도 좋아하지만 매일 술을 마신다고 했다. 듣자 하니 스스로도 이게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고 어떡하든 술을 끊고 싶어 했지만 다시 술을 찾는 일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전형적인 알코올중독 증세였다. 그러면서 글도 쓰신다는데 노트북이 90년대 거라 자판이 안 먹힌다고 했다. 마침 내게 낡은 노트북이 하나 있어 보내드리겠다고 하니 무척 좋아하신다. 나로서는 잉여의 물건을 정리할 수 있어 좋고 혼자 사신다는 그분은 그것으로 자신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분이 글쓰기에 몰입하다 보면 술을 좀 덜 마시게 될지도.

사실 나도 중독까지는 아니어도 은퇴 후 나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일을 미루는 습관이다. 현재 하는 일은 아무래도 현역 시절보다는 여유가 있는 편이다. 출장 다니는 일이 주업이라 시간도 자유롭다. 그런데 이게 좋은 면도 있지만 하루를 내밀하게 보내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일을 미룰만하니 미루겠지만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뭐 했나 싶을 때가 있다.


이 분의 알코올중독이나 나의 미루기 습관이나 정도의 차이지 증세는 비슷한 것 같다. 스스로 이게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고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습관으로 굳어진 때문이다. 습관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시작되지만 거듭되면 점점 끊어내기 어려울 정도의 천성이 되고 만다.

중독을 다루는 전문가들은 중독의 대상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려 말고 그런 환경에 노출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중독이란 이미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이니 싸워서 이길 대상이 아니고 피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알코올중독이라면 술이 안 보이는 곳으로 피해 다녀야지 술을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술집 앞을 지난다면 실패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미루는 습관도 새로운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왜 미루는 습관이 생긴 걸까? 은퇴 후 시간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유를 즐기면 될 일이지만 그렇지도 못한 게 미룬 일이 있다 보니 여유를 부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고 만다. 이럴 바엔 하루를 빡세게 돌리는 게 낫겠다 싶다.


우선 먼저 할 일은 ‘해야 할 일 100가지 적어보기’이다. 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책상 정리나 거실 청소 같은 것 말이다. 다음은 ‘하고 싶은 일 100가지 적어보기’이다. 일종의 버킷리스트이다. 해야 할 일 100가지, 하고 싶은 일 100가지는 중복되어도 상관없지만 ‘해야 할 일’은 당면의 성격인 반면 ‘하고 싶은 일’은 방향성이 강한 면이 있다. 100가지가 안 된다고 해도 기어이 100가지를 채워보자. 엄청 쥐어짜야 할 거다.

그리고 이때 하고 싶은 일 100가지는 재미의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다음 다섯 가지를 염두에 두자. 가지기(수집), 키우기, 배우기, 만들기, 만나기이다.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은 드물다고 하지만 계획이 없으면 지금의 시간을 너무 허투루 보내는 것 같다. 해야 할 일 100가지, 하고 싶은 일 100가지가 어쩌면 나의 은퇴 후 미루는 습관 고치는 데 일조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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