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은퇴를 했음에도 제법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더랬다. 재직 시부터 관심을 두고 진행했던 일들이 좀 있었고, 재능기부 차원에서 모임의 실무 일도 하다 보니 남들처럼 무료한 은퇴 생활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내가 너무 벌렸나 싶을 때가 있다. 더구나 월초부터 아버지의 입원으로 병원을 오가다 보니 이번 달 해야 할 것들이 조금씩 뒤로 밀리게 되었다. 어느덧 4월의 중순이 되니 그간 미루었던 것들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챙겨달라고 아우성이다. 보통 이럴 때 자주 써먹는 방법이 있다. 종이 하나를 꺼내어 쭉 리스트업 하는 일이다. 머릿속에 있을 때는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것 같은데 그냥 끄집어 내놓기만 해도 뭔가 좀 깔끔해지는 느낌이 든다.
다음은 순서를 메기는 작업이다.
우선 처리를 요하는 긴급한 일들부터 상단으로 올려둔다. 강원지역 출장으로 춘천, 원주, 강릉은 다녀와야 하고 5월부터 시작할 세미나 모집공고를 올려야 한다. 이제 막바지에 이른 동문회 영상편집 작업도 마무리 지어야 하고 유라시아 평론 사무국장직의 인수인계도 준비해야 한다. 기타 등등 나열하다 보니 문제가 있다. 이게 더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선순위에 따라 처리하다 보면 그냥 일 하나 해치웠다 정도의 마음만 남아 일에 대한 진심과 애정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했던 일인데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바람직하지가 않다.
그래서 더 간단한 워렌버핏의 방법을 써 본다.
먼저 해야 할 일을 리스트업하는 것은 동일하다. 이것저것 쭉 나열해 본다. 그다음이 좀 다른 데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만 선택하고는 나머지는 버린다. 당장 큰일 날 것 같지만 이것의 효과는 분명하다. 우리는 한 번에 하나 밖에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처음의 방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순서를 메겨 리스트업 해두면 1번의 일을 처리하면서도 2번의 일에 마음이 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워렌버핏의 방식을 적용하면 1번의 일을 할 때는 오직 1번의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버렸기 때문이다. 어찌 되건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버려야 한다.
그렇게 1번의 일을 마쳤다면 다시 해야 할 일의 리스트를 쭉 적어본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일 한 가지를 역시 골라내고 나머지는 또 버리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순서대로 할 일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지만 분명히 다르다. 일을 하나 마치고 나면 그 안에 사정이 바뀌어 가장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있을 때가 있다. 그러니 한 번 정한 우선순위에 고집하지 말자. 일 하나를 처리하고 다시 해야 할 일의 리스트를 정리하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뽑아 처리하고 나머지는 버리기를 반복해 보자. 뭔가 좀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첨부하자. 해야할 일이 아무리 많아도 하루에 3가지 이상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은퇴가 좋은 게 뭔가? 시간의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경험상 하루 3가지 이상 하게 되면 그때부터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 같다. 한두 가지 정도 하면서 나머지는 놀멍 쉬멍 하는 것이다. 명심하자. 우리는 한 번에 한 가지를 처리할 수 있을 뿐이고 인생은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