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공명을 우선시하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 인사들이 그랬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짱돌 하나 집어던진다고 세상이 바뀔 리 없다. 그 현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들은 왜 그리 무모한 선택을 하고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했던 것일까? 가끔 주변의 상황에 적당히 눈 감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고 원칙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이런 말들을 한다. "그 사람 참 피곤한 사람이네."
사실 변하지 않는 원칙이란 없는 것 같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건 당연한 것 같지만 전쟁터에서 적에 대한 살상은 아군에게는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안중근은 한국에서는 독립운동가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이다. 지구 온난화로 온실가스 감축을 내세우지만 경제개발이 한창인 개도국으로서는 선진국의 배부른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럼에도 원칙은 필요해 보인다. 비록 내 원칙과 저 사람의 원칙이 충돌한다고 해도 원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살아가는 밀도가 다른 것 같다. 지금껏 이게 내 삶의 원칙이라고 딱히 정해두고 산 건 아니지만 지금껏 살아온 행적들을 보면 대강 이런 원칙은 있었던 것 같다.
첫째, 먹고사는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잘 먹고 잘 사는 수준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활의 자립은 되어야겠다. 다행히 지금의 대한민국은 무얼 해도 생활의 자립은 이룰 수 있는 나라 같다. 나는 사회의 이상향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본인의 의식주도 해결 못하면서 사회적 이상만 추구하는 것이 잘 수용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직업의 귀천이 문제 되지 않는다.
둘째, 지적,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성과 영성이 있다는 것도 무시 못 할 영역이다. 단순히 먹고만 산다는 걸로는 만족 못 하는 게 인간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알고 싶고 개인의 영적 성장도 이루고 싶어 한다.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공부를 이어가야 할 이유이다.
셋째, 상생하는 사람이 된다
자본주의 속성 중에는 끝없는 경쟁이 바탕에 깔려있다. 한때 이겼다고 해도 이내 더 강한 놈이 나타난다. 경쟁의 부작용은 이긴 사람에게는 불안감을 주고, 진 사람에게는 분노와 적개심을 안겨 준다. 어떤 것이든 좋은 상태는 아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이 하는 것이 상생의 길이다. 지닌 친 욕심을 경계하는 길이기도 하다.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기 쉬운 세상이다. 변화도 빠르고 잠시만 한 눈 팔아도 뒤처진다며 경쟁을 자극하는 세상이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만의 삶의 원칙 하나 세우고 살아가는 게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