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럴수도 있겠지

by 장용범

가끔 ‘까칠하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경우일까 생각하니 명확한 거절 의사를 표시할 때인 것 같다. 보통의 한국적 정서는 상대방의 감정도 살피며 완곡하게 거절 하는 게 일반적인데 같은 말을 두 번 꺼내기 힘들 정도로 확 끊어버리니 상대로서는 감정이 상할만도 하다. 거절의 표시도 군더더기 없이 명확한 편이다. 이런저런 핑계라도 있으면 거절처리를 하며 접근이라도 할텐데 본인이 명확히 하기 싫다는데야 어쩔것인가?

이런 나에게 아내도 가끔 서운함을 표하는데 “가족에게 조차 그렇게 감정소모를 하기 싫으면 차라리 혼자 살지 그러냐”고도 한다. 나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지만 뭔가 매듭지어지지 않고 질질 끄는 자체가 영 불편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오해도 받는 것 같다. 게다가 어떤 일은 시간끌기가 답인 경우도 있는데 그걸 못견뎌 하니 가끔 불이익도 받는다.


그런데 내가 처음부터 이런 성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과는 달리 끌려다니며 뒤에서 가슴앓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언제부터 바뀌었나 보았더니 젊은 나이에 지점 사무소장직을 맡고 부터였던 것 같다. 보험영업을 하는 설계사 30여명과 생활하다 보니 사무소장의 우유부단함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새로운 내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럴바엔 되는 것은 된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명확히 선을 그어버리는 게 한 쪽의 욕은 들을지언정 조직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 쪽도 좋고 저 쪽도 좋은 경우는 가장 이상적인 경우지만 이해관계가 많은 조직을 운영하다 보면 그런 경우는 무척 드물다. 그 때 부터 모두에게서 좋은 소리 듣겠다는 마음을 내려 놓았던 것 같다. 내가 내린 어떤 결정에 대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마련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후로 자신이 원하는대로 수용하지 않고 명확한 거절의사를 들은 상대는 나에게 까칠하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가장 흔한 거절의 말이 ‘다음에 봅시다’거나 ‘검토해 보겠습니다’이다. 한 번은 내가 제출한 안에 대해 상급부서에서 검토해 보겠다기에 언제까지 검토할 건지 명확히 해달라고 했고 거절해도 상관없으니 가부의 판단을 해주어야 나도 다른 대안을 찾을 것 아니냐고 재촉했다가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제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니 좀 부드럽고 완곡한 거절법도 익혀야 하지만 괜히 상대에게 희망고문하느니 그 시간에 다른 대안을 찾으라는 명확한 의사표시가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래, 예수님이나 부처님도 그 시대에는 욕을 듣고 살았다는데 내가 뭐라고 좋은 소리만 듣고 살겠는가? 적당히 감수하고 살 일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