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지인 제주에서 호형호제하는 옛 상사분을 만났다. 2주간의 일정으로 제주 둘레길을 걷고 계시다는데 마침 나의 출장 일정과 겹쳐 잠시 뵌 것이다. 걷는 동안 면도를 안 하신 탓에 터프한 수염이 도리어 멋있어 보였다. 검은 수염보다 흰 수염이 더 많았는데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수염이 하얗다고는 생각 못 했다고 하신다. 이참에 한 번 길러볼까 하시기에 괜찮겠다고 했다. 하루에 40킬로씩 걷다가 너무 힘들어 30킬로로 줄였다고 하시는데 그것도 대단한 여정 같다. 초로의 남자가 30리터의 무거운 배낭을 메고 터벅터벅 혼자 걷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예나 지금이나 참 개성 있는 삶을 사신다 싶다. 저녁을 함께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내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흥이 좀 덜한 면이 있었다.
시절 인연이란 특정 시기에 나와 인연 지어진 사람들이다. 세상에는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필이면 그 시절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서로 같은 방향을 보며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당시 함께 일했던 상사들과는 재미난 기억밖에 없다. 일도 재미났었고 퇴근 후 술자리도 흥겨웠다. 하지만 나를 이끌어 주던 그분들이 한 분씩 퇴직하면서 직장 생활의 재미도 급격히 떨어졌었다.
요즘 인연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지금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까? 머리로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나와 주변인들의 삶은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기대여명이란 현재 나이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를 통계적으로 산정한 것이다. 나의 경우 대략 86세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인연들과 최대한 함께 지낼 수 있는 기간이 28년 정도이다. 이건 나를 기준으로 할 때이고 부모님의 경우처럼 먼저 떠나실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장 내일의 일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지금 내 주변의 인연들을 소중히 해야 할 이유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