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와 비교해 달라진 것이 결정론적 운명관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예전에는 많은 부분이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여겼으나 50대인 지금은 인생의 많은 부분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세상의 수많은 인과관계를 모두 알 수는 없으니 세상일은 나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것도 두 가지 방식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이미 다 정해져 있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는 소극적 방식이다. 게임의 결말이 정해져 있는데 과정의 충실함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반대의 관점도 있다. ‘세상일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그럼 나의 성공도 정해져 있을 수도 있겠네’라며 나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는 방식이다. ’죽음‘의 예를 들어보자. 죽음만큼 결정론적 운명관에 적합한 소재도 없는 것 같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뿐이지 모든 인간은 죽게 마련이다. 이런 죽음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법은
"어차피 죽을 몸, 그토록 아등바등 살 게 무언가? 상황이 되는 대로 적당히 맞추어 사는거지"라는 방식도 있겠고, "어차피 죽는단 말이지. 살아있는 이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구나. 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해 봐야지"라며 이것저것 도전하는 삶의 방식도 있다. 이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할 수도 있겠다.
A: 이미 결정되어 있는 일인데 뭐 그리 아등바등하게 사냐?
B: 그래, 이미 결정되어 있지. 내가 하면 되는 것으로.
예전에는 결정론적 운명관의 부정적 측면만 보았는데 인생을 좀 살고 보니 긍정적 측면도 보인다. 살다가 시련에 직면했을 때도 두 사람의 자세는 달라진다.
A: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하고 착하게 살았는데. 이게 내 팔자인가 보다.
B: 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이 시련은 신이 다른 기회를 주기 위한 전환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처럼 똑같은 시련이고 두 사람이 같은 결정론적 운명관을 가졌다고 하지만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보통은 A에 머물고 말겠지만 드물게 B의 관점을 가진 이는 지금 이 시기에 그 일이 내게로 온 것에 대해 크게 보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수용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인생을 점을 연결하여 완성하는 그림의 예로 들었다. 내 나이 중년을 넘겨보니 20대에 겪었던 그 일이 지금의 내 인생에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조금 알게 된다. 마치 전체 그림은 교회당 건물이지만 20번째 점을 연결할 때는 전체 그림까지는 볼 수도 없고, 그 점의 의미도 알 수 없었지만 100개 가운데 60번째 점을 이어갈 즈음 ’아, 20번째 그 점이 교회의 계단이었구나‘라고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전체 그림이 정해져 있다 해도 점을 연결하며 그리는 이가 중간에 그리기를 멈춘다면 그림은 완성될 수가 없다. 결정론적 운명관은 이렇게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