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중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다니다 보니 웬만한 찬송가나 유명한 성경의 구절 정도는 알고 있다. 그중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주기도문의 한 구절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이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을 읽는데 이 구절을 인용하며 사람들의 걱정의 근원을 찾아보면 오늘의 일에다 어제와 내일의 일까지 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기도문에는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했지 내일의 양식까지는 원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채권의 금리는 보통 기간이 길수록 높게 책정된다.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의 일은 어느 정도 예상되지만 1년이나 3년 후의 상황은 예측 불가한 경우가 많아 원금 회수의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래의 일은 알 수가 없다. 만일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결정 내릴 때 이렇듯 전쟁이 장기화되고 인적 물적 손실이 클 줄 알았다면 과연 시작을 했을까 싶다. 우리는 미래의 일을 떠올리면 희망과 기대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엄습한다. 그래서 나 스스로 세운 한 가지 원칙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이다. 여기에 실천 사항으로 일상에서 생각을 멈추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보의 입력을 줄이자는 차원에서 뉴스를 끊었다. 뉴스거리를 보면 내가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몰랐다고 해서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중요한 뉴스는 주변의 사람들이 미리 보고 전달해 주니 저절로 알게 된다. 또 뉴스의 대부분은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 부정적인 것들이 많아 불안과 걱정만 주는 것 같다. 더구나 인간의 심리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민감하기에 뉴스채널과 많은 유튜브 채널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것 같다.
어느 스님의 생각에 대한 조언이다. “생각이 많은 것은 건강한 상태가 아닙니다. 좋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과 생각을 멈추고 쉬는 사람의 행복도를 비교하면 생각을 멈추고 쉬는 사람의 행복도가 훨씬 더 높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주문을 알려주었다. “생각아, 생각아, 그 일이 일어나면 생각하자.”
원이 결과보다 과정에 충실한 것이라면, 욕심은 과정보다 결과에 치우친 상태이다. 등산으로 치면 원은 올라가는 중에 푸른 녹음도 보고 고운 꽃도 보는 반면, 욕심은 오직 산의 정상만 보는 것 같다. 사실 정상에 올라가도 있는 것은 바위 하나, 풀 몇 포기가 전부인데도 그렇다. 그러니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되 과정에 집중하려고 한다. 어차피 모든 인간의 종착역은 동일하다.
“주여, 오늘의 양식은 당연하고 인간 100세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50년 정도의 일용할 양식과 집, 입을 옷도 주옵소서. 그리고 차도 좀 바꿔야 하고 휴대폰도 최신형으로 교환해 주옵소서”라고 점점 요구 사항을 늘려가면 주님은 이리 물으실 것 같다. “그래, 알았다. 그럼 너는 뭘 할 건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