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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노동자가 되려면

by 장용범

‘노는 게 일’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을 구분 짓는 경계는 어디쯤일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돈이다. 놀면 돈을 못 벌지만 일하면 돈을 번다. 하지만 이것도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어떤 이는 놀면서 돈을 벌기도 하고, 사업의 경우 일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만 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돈에 관해서는 돈을 내고 하는 활동은 “노는 것”, 돈을 받는 활동은 “일”인 것 같다. 관객 수만 명이 모인 공연 무대에서는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는 일을 하지만 객석의 관객들은 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억지로 하면 일이지만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놀이라는 기준은 어떨까? 자발성 여부를 두고 일과 놀이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주로 종교나 사회단체의 자원봉사자들은 일은 일인데 돈이 매개되지 않는 일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대표적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실업의 대책으로 자원봉사를 제시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납득이 잘 안된다. 당장 먹고살아야 할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원봉사를 하라고 하면 그게 과연 수용이 될까 싶어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어차피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도입으로 인간의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공동체의 관점에서 잉여노동을 자원봉사로 돌려 개인에게는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공동체는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한다는 차원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하천이나 등산길에 흩어진 쓰레기를 줍거나 독거노인을 돌보는 일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실현되려면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일단 정부 등의 공동체에서는 보편적 복지로 개인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개인의 능력에 달렸지만 일을 않더라도 생활은 가능해야 의미를 추구할 여지가 생긴다. 여기에 돈을 중심에 두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에도 변형이 있어야 한다. 즉, 인간이 사는 게 꼭 호의호식만이 목적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도 추구해야 하지 않겠냐는 인식 전환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을 제도적으로 조절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종교나 교육계 등 사회 전반적으로 관여해도 될까 말까 한 이야기 같다.

일과 놀이의 경계는 돈의 매개처럼 명확한 게 아니라 그 활동을 대하는 개인의 자발성에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하기 싫지만 해야하는 게 대부분 일에 속하지만 그것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면 그는 놀면서도 돈을 받는 행운을 누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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