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법륜 스님 즉문즉설을 듣고 내 느낌을 적은 글이다.)
한 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하는 사람을 두고 마음이 굳은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고 싶다가 하기 싫다가를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도달하는 사람은 이런 변화무쌍한 마음에 끄달리지 않고 하기로 했으니 그냥 하는 사람이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의 다큐를 찍던 기자가 연습장에서 준비 운동을 하는 김연아에게 물었다.
*기자: 무슨 생각 하면서 (스트레칭을) 하세요?
*김연아: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이처럼 어떤 일을 끝까지 해내는 사람들은 하기로 했으면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냥 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의 일에 영원히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어리석다. 이슬람의 관용적인 인사말에 ‘인샬라’가 있다. 해석을 하면 ‘신의 뜻대로’이다. 문화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말이다. 돈을 빌려주면서 언제까지 갚으라고 했는데 빌린 상대가 ‘신의 뜻대로’라고 하면 빌려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실 그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상환일에 내가 갚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지금의 내가 어찌 알겠는가? 오히려 꼭 갚을게라는 말이 더 거짓말일 수도 있다. 영원히, 반드시라는 말이 허황된 이유이다.
그러니 마음을 다루는 방법은 마음에 너무 끄달리지 않는 것이다. 감정의 폭을 +100에서 -100까지라고 하면 오르내림의 폭을 적게 가져가는 것이다. 극희극비를 삼가고 일희일비 않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에 도달할 것인가? 이런 인연이 닿으니 좋은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저런 인연이 닿으니 이번에는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불교의 마음 수행법으로 마음과 나를 하나로 보지 않고 분리해서 보는 방법이다. 즉, 마음이 나(我)는 아닌 것이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의 정확한 표현은 저 사람을 보니 내 마음이 좋다 하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 사람은 나쁘다’도 그러하다. 일체유심조, 이처럼 나에게 인연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은 내 마음이 이리저리 재단하는 것이다. 이론은 그러하지만 수준이 이 정도까지 오르려면 상당한 수행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관리하면 뭐가 좋은데? 사실 이게 더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세상 사는데 괴로울 일이 없다’이다. 어떤가 이 정도면 한 번 해 볼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