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산을 오르면 스스로 생각해도 멋진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아마 자연의 맑은 기운이 정신까지 맑게 해서 그런가 보다.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지려는 데는 많은 애를 쓰지만 가진 것을 제대로 누리는 데는 인색하다.
지금 생각해도 꽤 괜찮은 말 같다. 사실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이야기는 상투적으로 알고 있지만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온전히 제대로 누리는 삶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행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누리려면 자신의 시간 흐름을 좀 천천히 가져가야 한다. 고은의 <그 꽃>이란 시에도 있지 않은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산의 정상에 올라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길가의 꽃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급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다른 일행보다 좀 더 빨리 올라가려고 걸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꽃이 보이거나 풀 내음이나 새소리가 제대로 들릴 리 없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다르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든 중간에서 내려오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계속 헉헉거리며 올라가는 것에만 마음을 두다가 어느 날 그게 더 이상 의미 없어지는 시기가 오면 비로소 주위가 보인다. 그렇게라도 보이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리고 산행이란 정상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에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정상에 오르는 것은 ‘등정’이라는 다른 말이 있다. 대부분은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지 등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산행을 하다 보면 등정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하고 싶었던 산행은 한 것이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나은 삶을 살았으려나?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게 맞았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가지려는 마음보다는 가진 것을 누리려는 마음을 내어보려 한다. 우리는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온갖 머리를 쥐어짜며 노심초사하지만 정작 바라던 것이 내 손에 들어오면 시큰둥해진다. 그리고 이내 내게 없는 다른 것에 눈이 돌아간다. ‘무소유’의 저자인 법정 스님은 뭐든지 하나만 있을 때는 귀한 줄 아는데 둘이 되면 이미 가진 것의 귀함도 사라진다고 했다. 만일 지금 나에게 컵도 하나, 펜도 하나, 접시나 그릇도 하나, 책도 한 권, 공책도 한 권이라면 그것들이 얼마나 귀할 것인가. 군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끝에 포크 형태의 숟가락 하나를 받았었다. 훈련 마칠 때까지 추가 배급이 없다는 말에 훈련 중 잃어버릴까 봐 얼마나 신경 쓰였는지 모른다.
가진 게 있어야 누리지라고 할 수 있지만 더 가진 사람과의 비교에서 벗어나 현재 내가 가진 것을 찾아보면 어떨까. 두 눈이 있는가? 정말 대단한 것을 가졌다. 어제 장님 한 분이 지팡이에 의존해 가는 모습을 보고 내 눈에 새삼 감사했다. 아침에 밥을 굶지는 않았는가? 적어도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들보다는 나은 상황이다. 사람의 본성으로 보아 비교 않기는 어려울 테니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한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