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7코스를 걸었다. 울산의 태화강 국가정원에서 출발해 강을 따라 내려가 염포산 입구에서 마치는 코스이다. 코스가 달성될수록 부산에서 점점 멀어지니 출발 지점에 가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교대역에서 동해선을 타고 울산 태화강역까지 전철로 갔다가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일요일이라 나들이객들이 많았다.
태화강 국가정원은 십리대밭길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지금은 가을이라 억새 물결도 장관이다. 카메라 렌즈를 나에게 돌려 연신 가다찍기를 반복했다. 이날의 코스는 강변길로 내려가는 코스라 내심 자전거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분명 공유 자전거가 있을 테고 그것을 타고 내려가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코스를 완주할 것 같았다. 이렇듯 코스를 앞두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 것도 재미이다. 지금 내 휴대폰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공유 자전거 어플이 깔려있다. 출장이 많다 보니 현지에서 이동할 일이 잦고 차를 타기에 애매한 지역은 공유 자전거를 이용하는 편이다. 법안 제정으로 사설 자전거나 킥보드 공유 업체들은 늘어났지만 이용자들이 아무 데나 방치해 새로운 공해가 되고 있나 보다. 역시 제도를 본래 취지대로 운영되게 하려면 적정한 관리 시스템이 따라야 한다.
예상대로 공유 자전거가 있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어플을 꺼내 결재를 마쳤다. 이용은 편리하지만 높은 요금은 불만이다. 한 시간 정도 타면 거의 만원 정도 나오는 것 같다. 시원한 강바람을 느끼며 페달을 힘껏 밟는다. 강가에 늘어선 지나치는 억새의 물결에 절로 콧노래가 난다. 그런데 좀 달려는가 싶었는데 자전거에서 연신 운행 가능 지역을 벗어났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별수 없이 이제부터는 자전거를 반납하고 걸어야 한다. 태화강변을 따라 이어진 아산로를 걸었다. 아산은 현대 정주영 회장의 호이다. 울산과 현대, 정주영 회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아산로는 현대자동차가 정주영 회장을 기려 건설한 도로라는 안내석이 보였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을 걸으며 정 회장을 생각한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그의 기업정신은 젊은 시절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새로 뭔가를 이루기보다는 지금처럼 평안하고 넉넉하게 지내고 싶다. 한 마디로 지금이 딱 좋다. 이렇듯 같은 말이라도 나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아산로를 걷다 보면 울산의 주요 기업들을 만나게 된다. 멀리 현대미포조선소를 비롯해 강 건너편에는 석유화학 단지들이 즐비해 있고 길의 좌측에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다. 공장 규모가 얼마나 큰지 한참을 걸어도 공장의 담벼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정말 장관을 보게 되는데 선적을 기다리는 자동차들이다. 가끔 사진에서만 보던 바로 그 장면이다. 코나, 펠리세이드 등 수 천대의 자동차들이 실어 나를 배를 기다리는 모양새다. 그 광경을 보니 내 마음도 뿌듯하다. 1953년 한국전쟁 후 전 세계의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지금은 자동차, 조선, 항공기를 만드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식민지를 겪은 나라 가운데 유일한 성공 케이스다. 잘 살아보자. 자식세대는 더 나은 환경을 물려 주자는 위 세대의 큰 희생 덕분이다. 절로 감사의 마음이 든다. 강변에서 염포산을 접어들며 7코스는 끝이 났다. 이번 해파랑길은 비록 바닷길은 아니었지만 국가정원과 억새길, 국가 산업의 현장을 곁눈질하며 지나온 길이었다. 코스에 대한 별점을 후하게 주고 싶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드는 생각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800킬로미터 정도이다. 해파랑길은 770킬로미터로 연장 길이로는 큰 차이가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목을 받자 국내서도 유사 둘레길이 많이 생겨났다. 서울도심성곽길, 북한산 둘레길,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파랑길, 지리산 둘레길 등 듣기만 해도 걸어볼까 싶은 곳이 꽤 많다. 새삼 기획의 중요성을 느낀다. 좁은 국토지만 어떻게 기획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음이다. 익숙한 것을 달리 볼 수 있는 눈과 잘 된 것을 벤치마킹해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중요해 보인다. 강원도 길은 출장 때마다 걷고, 남쪽에서는 계속 북상하니 이제 51코스 중 총 8개 코스를 지났다. 내가 중단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완주의 날도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완주라는 결과가 아니라 걷는 과정이다. 우리네 인생도 완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 완주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모습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