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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Jun 05. 2020

허랑방탕의 끝은 유급

예과 2년을 지나 본과에 올라가면 본격적인 의대생의 삶이 시작된다. 본격적이라고 해 봤자 사실 별 거 없고, 고등학생의 생활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한 학년 전체를 한 강의실에 몰아넣고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진행한다. 고등학생과 다른 점은 매주 시험을 보는데, 이 시험 한 번 한 번의 중요도가 수능에 맞먹는다. 한 번이라도 시험을 크게 망치면 고3의 재수와 다름없는 유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대의 독특한 커리큘럼이 매주 시험을 보게 만든다. 병원에서 활발하게 일하는 의대 교수들의 특성상 학생에게 한 학기 동안 묶여 있을 수는 없다. 대신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한 과목에 대하여 강의를 진행한다. 이를 블록형 강의라 하는데, 1교시 국어-2교시 사회-3교시-과학 이렇게 가지 않고, 첫 2주는 오직 국어, 다음 2주는 오로지 사회, 그다음 2주는 과학만 배우는 식이다. 각 과목마다 시험이 최소 2번은 있기 때문에, 매주 시험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짧은 기간 동안 치러진 시험과 출석, 과제 점수 등을 합산하여 과목이 끝난 다음 주에 공개가 된다. 거기서 하위 2.5%에 들어가는 학생은 유급 고려 대상이 되는데, 전체 인원이 40명이 조금 넘기 때문에 과목마다 꼴찌와 그 앞의 한 명까지 고려 대상이다. 학기가 끝나면 교수님들이 모여서 ‘성적 사정 위원회’를 열고 회의를 거쳐 최종 유급을 결정한다. 최종 유급 결정에는 변수가 많아서 한 과목만 못해도 유급이 되기도 하고, 여러 과목에서 위기를 맞고도 진급하는 경우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매주 보는 시험 중에 안 중요한 시험이 없었다. 다만 중요한 시험이라고 해서 꼭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매 시험 1등을 목표로 공부했겠지만, 오로지 진급이 목표인 학생들도 꽤 있었다. 각자의 목표에 따라 공부량의 편차가 상당했는데, 나는 남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뒤에서 2등까지 유급 고려 대상이니까, 뒤에서 3등을 하면 진급이구나! 넉넉하게 뒤에서 5등만 하자.’


본과 첫 과목은 해부학이었는데, 처음이다 보니 필요 공부량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조금 열심히 했더니 뒤에서 10등을 하는 기염을 토해버렸다. 감을 잡고 점차 공부량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의대생의 공부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어떤 요일에 공부를 시작하는지 보면 된다. 월요일부터 새로운 내용을 배우기 시작하여 토요일 오전에 시험을 보는데, 최상위 친구들은 월요일 수업을 마친 후 바로 공부를 시작한다. 대부분은 과목의 난이도에 따라 화요일이나 수요일에 시작한다.


나는 두 번째 과목부터 목요일에 공부를 시작했다. 그전에 공부를 시작해봤자 긴장이 안 되고, 집중력이 안 올라와서 의미가 없었다. 학기가 조금 지나면서 공부 요령이 생기고 자신감이 붙으니까 긴장이 더 풀려버렸다.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아침까지 초집중 모드로 매주 벼락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성적은 항상 뒤에서 5등이었다. 그 등수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 내 덕이라기보다는 아래의 친구들 덕분이었다.


앞 과목에서 유급 고려 대상이 된 친구들은 보통 교수님을 찾아가서 싹싹 비는 전통이 있다. 거기서 교수님께 부정적인 의견을 들으면 다음 과목을 공부할 의욕이 싹 사라지게 된다. 지금 열심히 해봤자 유급하면 어차피 다시 들어야 할 과목이기 때문이다. 올해 잘해놓으면 내년에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조언은 깨져버린 멘탈을 붙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초반 과목을 망치고 1년 내내 정신줄을 놓아버린 몇몇 친구들 덕에 무난하게 목표 등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과의 첫 1년이 끝나고 마지막 과목의 등수를 확인한 뒤 맘 편하게 방학을 즐기고 있었는데, 내가 깜짝 유급 대상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반적으로 각 과목의 유급 고려 대상에게는 F 학점을 줌으로써 유급을 확정한다. 그 이외에도 평균 학점 기준이 있어서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F 학점 없이 유급이 가능했다. 평균 학점 기준이 4.5 만점에 2.0이었는데, 내 최종 학점이 무려 '1.99' 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 기준은 전년까지만 해도 1.75였는데, 학교 측에서 그 해 초에 2.00으로 올린 것이었다. 기준이 오른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했었는데, 그 변경의 첫 수혜자가 되는 쾌거를 이뤄내고 말았다. 이 1.99라는 학점은 절대 우연 일리는 없다. 교수님들이 회의하여 아슬아슬하게 2.0이 안 되는 학점을 만들었을 것이다. 평균 학점 기준도 올렸겠다, 학업에 소홀한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겸 한 명을 신선한(?) 방식으로 유급시킴으로써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다.


유급이 확정되고 우선 자기 합리화를 실행했다. '한 학번 밑에 친한 후배들 많으니까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없을 거고, 현역으로 입학했으니까 그냥 재수 한 번 한 셈 치면 되고, 매년 대여섯 명씩 당하는 거니까 창피해 말고 당당하게 가자. 부모님한테는... 부모님한테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너무 죄송했다. 등록금, 자취방, 용돈...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온 것들에는 다른 걱정 말고 공부에만 집중하라는 부모님의 단 하나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부모님의 뜻을 왜 전에는 몰랐을까. 몰랐던 게 아니다. 모른 척했던 거다. 그 소망을 알면서도 정면에서 배신한 게 나라는 아들이었다. 진급만 하면 된다는 생각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그마저도 못해냈다. 부모님을 생각할수록 자괴감이 폭포수처럼 밀려왔다. 부끄러운 마음에 더 큰 불효를 저질렀다. 다음 학기 시작까지 유급 사실을 은폐하고, 본가에도 몇 달을 안 들어갔다. 얼굴을 뵙고 말씀드릴 자신이 없었다.


몇 달 후 학교에서 발송한 학사 경고 우편으로 진실을 알게 되신 부모님에게 호출되어 따끔하게 혼났다. 혼나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부터 허랑방탕 의대생에서 바른생활 의대생으로 변하게 됐다. 이후에는 성적도 많이 올라서 장학금도 받고, 부모님의 신뢰도 회복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유급 이야기를 하곤 한다. 돌아보면 유급으로 잃은 건 겨우 1년이다. 까짓것 남들보다 1년 더 살면 된다. 반면 유급으로 얻은 건 정말 많은데 한 마디로 줄이겠다. 사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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