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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Jun 07. 2020

의대생 시절부터 이어오는 딜레마

병원을 돌아다니는 임상실습학생이 되면 환자를 배정받는 경우가 많다. 일주일 동안 환자를 통해 공부를 하게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학생은 배정받은 환자의 기록을 확인하여 언제부터 어떻게 아팠고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확인한다. 이후 환자에게 찾아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청진기로 소리를 들어보기도 한다. 일주일의 끝에는 환자에 대하여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교수님 앞에서 발표하고 평가를 받게 된다.


이때 어떤 환자를 배정받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다 같은 환자겠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환자마다 난이도가 다르다. 난이도에는 여러 기준이 있는데, 가장 어려운 환자는 오래된 환자다. 오래된 환자일수록 봐야 될 기록이 많고, 짧은 시간 내에 정리해서 발표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환자 배정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어떤 날은 아주 기록이 긴 환자를 배정받았다.


환자 기록을 보고 막막해하고 있는데, 배정받은 날 오후에 갑자기 환자가 사망했다. 그리고 다른 간단한 환자로 새롭게 배정이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처음 느낀 감정은 기쁨이었다. '역시 난 운이 좋아' 생각이 들었다. 룰루랄라 새 환자를 보는데, 갑자기 자괴감이 들었다. '의사 될 놈이 사람이 죽었는데 웃고 있네' 얼굴 한 번 못 본 환자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다른 사건도 있었다. 흉부외과 수술 참관 중의 일이다. 폐암 수술을 하러 가슴을 열었는데, 전이 소견이 보였다. 전이가 있으면 말기암이라서 수술을 못 한다. 수술 시작 30분 만에 가슴을 닫게 되었다. 그 날은 오전 내내 수술 참관하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자유 시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다. 옆의 친구와 함께 눈빛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수술복을 갈아입으면서 친구와 함께 자괴감을 나눴다. 환자는 말기암 판정을 받았는데 자유 시간 생겼다고 기뻐하는 꼴이라니.


인턴이 되어서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매일 힘들게 하던 환자가 사망했을 때,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새어 나왔다. 심장 수술 전날 전신 소독(아주 힘든 일)을 해줘야 하는 환자가 교수님과 대판 싸우고 수술을 취소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일을 줄여주는 상황이 왔을 때, 기쁨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지속적으로 찾아왔다.


그래서 자괴감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말하자면, 달라진 게 없다. 그냥 익숙해졌을 뿐이다. 환자가 나빠지는 것은 큰 병원에서는 흔한 일이다. 경우에 따라 일이 많아지기도 하고, 일이 줄어들기도 한다. 바쁘게 환자를 보는 게 일상인데, 어쩌다가 일이 줄어들면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다. 기뻐하는 스스로에게 '아직 부족하구나' 느끼는 것도 여전하다.


나의 감정에 익숙해지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 내 앞의 환자는 감정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환자는 빨리 낫고 싶은 마음뿐이고, 그 마음을 충족시키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또 다른 깨달음은 환자가 나빠지지 않으면 딜레마에 빠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환자가 좋아져서 일이 적어진다면 모두가 떳떳하게 뻐할 수 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열심히 일해서 딜레마를 최소화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최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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