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나올 이야기는 얄팍한 의학 지식을 가진 의대생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의대생 신드롬'이라고도 부른다. 의대생 때는 죽을 수 있는 위험한 병 위주로 공부하기 때문에, 흔하고 별 거 아닌 질병에 걸렸을 때에도 드물고 위험한 질병을 먼저 생각하여 스스로를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본과 1학년 2학기, 소화기내과 수업 중 간 질환에 대하여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 간염, 간암 등 수많은 질환을 배우는데, 어떤 간 질환이든 공통적으로 피로감과 함께 황달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갑자기 내게 간 질환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그즈음 들어 마침 얼굴이 누렇게 뜨고, 자도 자도 피곤한 증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어릴 때 할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던 거 같기도 하고(암은 유전되는 경향이 있다),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너무 많이 먹은 거 같기도 했다.
'설마, 혹시 간암에 걸려버린 것인가? 이거는 못해도 간염이다!' 공포감에 순간 사로잡혔다. 당장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붙어 있는 아주대병원에 가기로 하고 절차를 알아봤더니, 진료의뢰서가 없으면 소화기내과 진료는 불가능하고 가정의학과 진료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날로 진료를 잡고 가정의학과로 달려갔더니 '일반진료'로 연결해주었다. 당시는 일반진료가 뭔지도 몰랐는데, 일반진료는 교수님이 아니라 레지던트가 보는 진료를 뜻한다.
들어가서 교수님(사실은 레지던트)께 상황을 설명했다. "간 질환 수업을 들었는데, 왠지 의심이 된다. 검사를 해보고 싶다." 경험 많은 교수님이었으면 한 번 크게 웃고 나를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을 거 같다. 기저 질환 없는 멀쩡한 20대 초반 대학생의 간이 안 좋을 확률은 극히 낮다. 매일같이 술을 궤짝 째로 마셨다고 해도 간이 상하지 않을 나이다(실제로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지던트는 나의 말을 경청한 후 한참 고민하더니 피검사를 하고 1시간 뒤에 다시 보기로 했다.
피검사 결과는 매우 정상이었다. 조금 경험이 부족한 교수님이었으면 거기서 나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의심마저 깨끗이 해결할 수 있는 검사 결과였다. 하지만 레지던트는 나의 걱정과 피로를 해소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양이 듬뿍 담긴 10만 원짜리 수액 주사를 권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이자면, 이 수액 처방은 100%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처방이다. 개인 병원이면 몰라도, 대형 병원 레지던트는 몇십만 원짜리 수액을 처방해도 본인한테 떨어지는 게 없다.
수액을 맞고 하루 이틀이면 좋아진 게 확 느껴질 거라고 했는데, 전혀 나아지는 게 없었다. 처음부터 나쁘지 않았으니 좋아지는 게 있을 리 만무하다. 돌아보면 그때부터 만성 피로가 시작된 듯하다. 본과에 오면서 밤새는 일이 잦아졌는데, 그렇다고 낮에 충분히 잠을 보충할 여건은 안 됐다. 주말에는 또 놀아야 되니까 안 잤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수면 시간이 4~5 시간으로 줄어들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버틸만했다. 그러다 점점 피곤함이 극에 달하게 되었고, 얕은 지식으로 간 질환을 의심하는 상황까지 갔던 것이다.
간 질환이 아닌 수면 부족에서 나오는 만성 피로라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그냥 피로와 함께 살아간다.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 10시간을 잘 수 있는 날에도 5시간이면 눈이 떠지니 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남들보다 시간을 많이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피곤한 몸과 머리는 깨어있어도 자고 있는 것처럼 일을 한다. 수면제, 멜라토닌 젤리, 수면 유도 음악 등 여러 시도를 해봤는데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아침 출근 후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가득찬 얼음과 점심 식사 후 30분의 낮잠이 그나마 가장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