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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Jul 19. 2020

사회로 나가기 직전의 돈 이야기

정식으로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18년 3월이지만, 1월 중순 의사 시험 합격 발표가 나온 순간부터 마음은 이미 들떠 있었다. 조만간 직접 벌어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긴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사실 돈을 쓰고 싶은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몇 년간 매일 PC방으로 출근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이제는 집에서 나만의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싶은 작은 꿈이 있었다. 또한 일을 시작하는 3월부터는 게임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인생 마지막 방학을 게임으로 알차게 채워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부모님이 나의 작은 꿈을 이해해주리라 믿고, 합격 발표 전에 미리 컴퓨터를 알아봤다. 마침 친구가 컴퓨터를 새로 산다고 원래 쓰던 꽤 좋은 컴퓨터를 헐값에 판다고 하였다. 일반 중고가보다 50만 원 정도 싼 가격으로 협상을 마치고 며칠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합격 발표 당일 본가에 찾아가 저녁을 먹고 한창 분위기를 끌어올린 뒤 얘기를 꺼냈다. 컴퓨터 사게 100만 원만 달라, 친구가 굉장히 싸게 판단다 했더니, 예상치 못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친구 말을 어떻게 믿냐, 친구면 공짜로 줘야 되는 거 아니냐...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즉시 짐을 챙겨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은행에 가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했다.


몇몇 은행에는 의대생과 의사를 위한 마이너스 통장 상품이 있어서, 학교와 병원에 자주 찾아와 홍보를 하곤 했었다. 꽤 낮은 이율에 한도는 높게 설정되어 있어서 학생 때부터 용하는 친구들도 몇 명 있었다. 아침 일찍 의사 합격증을 뽑아 들고 은행으로 찾아갔더니 금방 통장을 만들어주었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니까 친구의 100만 원짜리 중고 컴퓨터가 성에 차지 않았다. 새 걸로 맞추기로 마음먹고 하루 만에 컴퓨터 관련해서 400만 원을 썼다. 그 뒤로는 더 쓰지 않고 3월부터 6개월 동안 나 갚은 뒤 바로 통장을 없앴다


그렇게 부모님 몰래 아름다운 소비를 하고, 한 달 정도 지난 2월에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월급이 들어오면 전부 본인에게 맡기고 생활비를 받아쓰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집도 사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돈 쓰는 걸 보니 관리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얘기를 듣자마자 격분하여 길거리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말할 수 없는 은밀한 빚이 있어서 조급했고, 나의 경제관념을 무시하는 것에 화가 났으며, 한 달 후면 어엿한 사회인이 될 나를 아직도 통제하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독립심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언쟁 후에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보이셨고, 퇴근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께 크게 혼났다. 아직까지는 인생의 마지막 불효로 기억한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싸움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부모님은 나의 독립을 인정하고 나에게 들어가던 모든 비용을 스스로 처리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두 번째 월급날부터 완전한 독립을 했다. 부모님이 내주시던 자취방 월세, 관리비, 통신비, 보험료 등을 전부 내 계좌로 옮기고, 세금 혜택을 위해 주소 이전도 했다. 한국 나이 27살에 둥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홀로 섰다.


독립했다고 해서 부모님과의 관계가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부모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밥은 잘 먹고 다니나 걱정되는 철없는 아들일 것이다. 그래도 나의 독립성은 철저히 지켜 주신다. 재산 관리에 몇몇 조언을 하실지언정 과도한 개입은 전혀 없다. 나도 거칠게 독립한 만큼 책임감 있게 재산을 관리하고 있고,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간간히 용돈도 드리 한다.


독립 후 처음에는 홀로 섰다는 자부심이 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헌신을 깨닫는다. 관계에서 돈을 치우고 보니 그 뒤에 가려져있던 마음이  명확히 보인다. 평생 가도 못 갚을 은혜지만 가끔 부모님이 나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면 조금이나마 갚는 느낌이 든다. 부모에게서 독립한다는 것은 관계의 끊어짐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의지하던 관계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로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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