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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Jul 21. 2020

사회 초년의 돈 이야기

노동의 가치에 대한 고찰

2018년 3월부터 1년 동안 병원에서 인턴 일을 하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남의 돈 벌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주 52시간이다 뭐다 할 때였는데, 의사는 특별법이 적용되어 주 80시간씩 일했다. 나오는 월급이 초봉치고 적지는 않았지만 시급으로 따지면 만 원이 안 됐다. 초과 근무하는 날도 많았는데 주 80시간 이상 일하면 나라에서 페널티를 주기 때문에 초과 근무는 있어도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 노동의 가치가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사실과, 추가로 일하고도 돈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화가 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적응하여 '어디 남의 돈 벌기가 쉽냐'하는 마음으로 주는 대로 기쁘게 받았다. 그래도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다. '노동의 가치'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됐고, 수많은 선배 의사를 보며 노동의 가치를 정하는 다양한 기준들을 찾았다.


가치를 정하는 첫 번째 기준은 시간이다.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일을 더 잘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한 직업으로 오래 일하면 직급이 점점 올라가고 직급에 맞게 월급도 점차 늘어난다. 또한 시간이 지나 몸 쓰는 일에서 머리 쓰는 일로 업무가 변한다면 노동 가치 상승은 더 가팔라진다. 머리 쓰는 일은 몸 쓰는 일보다 효율이 높은 데다가, 사회는 머리 쓰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병원에는 매년 새로운 의사가 들어오기 때문에, 큰 노력 없이 직급 상승이 이루어지고 머리 쓰는 일의 비중이 증가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버는 돈은 꾸준히 올라가는 것이다. 다만 병원에서 별다른 평가 없이 시간에 따른 성장을 인정해주는 것은 첫 5년 만이다. 이후에는 증명의 시간이 온다.


가치의 두 번째 기준은 능력이다. 큰 병원에서 5년 정도 훈련을 받고 나면 다양한 진로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의사를 보면 선택한 분야에 특화된 능력을 갖추고 있다. 큰 병원에 남아 교수가 되는 의사는 연구 능력이 뛰어나다. 이는 큰 규모의 연구비를 유치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병원의 명예를 드높인 대가로 인센티브를 받게 된다. 밖에 나가 개원하여 성공하는 의사는 사업 수완이 좋다. 시장 흐름을 잘 읽고, 병원 위치를 잘 잡고, 홍보에도 탁월하다. 반대로 사업 수완이 없으면 아무리 똑똑한 의사라도 폐업할 수 있다. 재밌는 건 의외로 인성이나 진료 기술은 성공과 큰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돈 잘 버는 능력은 따로 있고, 능력이 있다면 주도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다.


세 번째 기준은 희소성이다. 국민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데 훈련이 힘들어서 아무도 안 하는 과가 있다. 그런 과는 나라에서 돈을 주면서 제발 해달라고 애원한다. 외과는 나라에서 매달 200만 원씩 주고, 흉부외과는 300만 원씩 준다. 학문이 어렵고 재미가 없어서 아무도 안 하는 과도 있다. 이런 과들은 나라에서 필수로 쳐주지는 않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분명히 필요한 과들이다. 병원에서는 희소성 높은 과의 의사에게 더 높은 연봉을 다. 다른 의사보다 경력도 짧고, 능력도 증명하지 못한 의사가 오직 희소성 때문에 더 높은 월급을 받는 것이다. 희소성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 노인 환자가 많이 늘어나면서 관련 의사가 부족해질 수도 있고, 국가 정책으로 인하여 충분했던 의사가 더 많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희소성으로 인한 이득이 크다면 새로운 의사들이 들어오며 희소성이 사라질 수도 있다.


인턴이 끝날 때쯤, 1년 간의 고민을 토대로 희소성이 있는 과를 선택하여 노동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다른 과보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병원에서 월급을 좀 더 쥐어준다. 선택 2년 차인 지금은 우선 버텨내며 시간의 힘으로 나의 가치를 올리는 중이다. 1년 차보다 2년 차의 월급이 더 많고, 최저시급이 오르는 것도 알게 모르게 반영된다. 다음 문제는 능력이다. 가장 어려운 일이다. 몇 년 안에 쓸만한 능력을 키워내 인정받아야 하는데, 만만치 않은 일이라 부담이 있다. 


세상에 숭고하지 않은, 신성하지 않은 노동이 어디 있겠냐마는, 노동의 가치는 저마다 다르다. 그 가치는 자신이 우겨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세상의 냉정한 평가에 의해 정해진다. 노동자는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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