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부작 미니시리즈"로부터의 자유를 향하여
한국 드라마는, 크게 네 종류 쯤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일드라마, 미니시리즈, 대하 드라마, 그리고 주말극. 이 네 종류의 드라마들의 편수는 각기 그 이름에 맞추어서 다른데, 이 한국 드라마의 형식에 있어서 가장 독특한 점은 어떤 미니시리즈라도 꼭 ‘16부작’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스타 배우, 스타 작가, 스타 PD가 함께하는, 드라마의 꽃인 ‘미니시리즈’. 또, 이 16부작 미니시리즈 회차의 시간 분량은 통상적으로 60~80분정도다. ‘미니시리즈’는 왜 항상 16부작일까? 각각 60분짜리, 16부작의 호흡을 가진 이야기라면 실제로 ‘미니’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이는 한국 드라마에 있어서 일종의 불문율과 같은 법칙인 것이다.
하지만 이 형식이 최근들어서 깨어지기 시작했다. 넷플릭스, 카카오,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이 등장하면서부터 이 플랫폼에 들어가는 일종의 ‘미니시리즈’들이 다양한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첫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 6부작에 각 회차는 40~60분이다. 숏폼 드라마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연애플레이리스트>, 시즌 1이 8부작에 5분 남짓 되는 분량이었다. 넷플릭스는 몰아보기에 최적화 되어있으며 유튜브는 10분 이상 넘어가는 영상에 시청자를 붙잡기 어려우니, 결론적으로 각 플랫폼에 따라 적절한 형식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더이상 TV 방송용 드라마 또한 ‘16부작’이라는 형식을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아직까지는 16부작 미니시리즈가 일종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으나, JTBC <쌍갑포차>는 10부작, MBC <십시일반>은 8부작,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12부작. 다양한 회차를 가진 드라마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해, 앞으로 한국 드라마 시장에 다양한 형식과 분량을 가진 드라마들이 나오게 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겠다.
다양한 플랫폼에 맞는 다양한 형태. 이것이 드라마에 끼칠 영향은 무엇일까? 이를 위해 먼저 ‘16부작 미니시리즈’라는 형태가 한국 드라마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보아야 한다.
드라마에 있어서, 형식이 더 먼저일까, 내용이 더 먼저일까? 흡사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이다. 16부작 미니시리즈가 불문율이었던 한국 드라마는, 사실 이제까지 형식이 내용보다 우선했던 게 아닐까? ‘16부작’이라는 형식에 맞추기 위하여 후반부 갈등을 과도하게 형성해 결과적으로 드라마 전체의 완성도를 떨어트린, 아쉬운 드라마들이 생각 난다. SBS <스토브리그>, 초반부에는 드림즈의 새 단장과 드림즈 내부 직원들간의 갈등, 트레이드와 용병 문제 등 야구계의 내용을 잘 담은 갈등들로 잘 구성된 드라마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권경민 사장(오정세 분)이 의도적으로 드림즈를 괴롭히는 모습이 반복되기만 했다. TvN의 <슬기로운 감빵생활>, 범죄자로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에게 선의를 부여하면서 따뜻한 휴머니즘을 보여주었지만 후반 갈등을 만들기 위해서 캐릭터 하나를 악역으로 희생시켜버렸다. 이처럼 웰메이드로 평가되는 한국 드라마라도 이제껏 10부작 내지는 12부작 정도의 내용을 16부작으로 늘리면서 후반부 갈등을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부분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는 형식에 자유가 선포되면서, 더이상 내용을 형식에 맞춰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4부작에 적당한 내용은 4부작으로, 10부작에 적당한 내용은 10부작으로, 20부작에 적당한 내용은 20부작으로! 20분짜리는 20분 짜리로, 60분짜리는 60분짜리로.
결국 프로듀서에게 중요한 역할은 이 내용이, 어떤 형식에 적합할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례로 최근 웹툰, 웹소설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긴 웹툰의 호흡을 끊어내는 탓에 드라마로서의 개연성이 손상되는 때가 있다. 이 경우는 24부작 정도로 만들게 되면 오히려 그 완성도가 더 올라갈 것이다. 반대로는, 단막극에서 확장되는 드라마는 짧은 내용을 늘리다보니 전개가 지루하고 느려져 버리거나,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한 억지스러운 갈등들이 반복되곤 한다. 이 경우는 6부작 정도로 컴팩트하게 만들면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찾아내는 것, 갈수록 드라마 프로듀서에게 더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다.
이제껏 미니시리즈를 16부작으로 고집했던 것은 제작사의 사정이나 광고료 수입 등의 환경적인 이유가 있음을 안다. 하지만 어쨌든 드라마를 통해서 가장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흥행’이다.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드라마와 이야기를 접하고, 또 유튜브를 통해 짧고 확실한 호흡의 영상에 익숙해진 시청자를 상대해야하는 시대에서는 완성도와 흡입력이 높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 흥행으로 가는 ‘키’다. 완성도가 높은 드라마는 입소문을 타서 결국 어디선가라도 흥행에 성공하고, 초반부가 지루한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기다려주지 않으며, 갈수록 지루해지는 드라마는 ‘정’으로 볼지언정 마지막에 긍정적인 평가가 남지는 않는다. 심지어 후반부라도 하차하는 시청자도 꽤 된다. 볼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시청자들은 냉정하게 ‘정 들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성도가 과연 시청률과 흥행을 담보해줄까? 시청자들의 안목을 믿는 낙관 아닐까? 글쎄, 오히려 현재의 드라마 시장은 그것을 간과하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