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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r 19. 2022

배꽃, 꿀벌, 그리고 사람

4월

기지개를 펴면서 눈을 떴다. 따뜻한 온도가 몸 곳곳으로 스며드는 이 느낌! 벌써 그럴 때가 되었구나, 포근한 온도에 몸을 맡기며 다시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1년, 1년 동안 열심히 자라고 열심히 먹이고 열심히 살아가야지. 아 맞다, 올해는 동생들도 태어났다. 떡잎부터 나보다 컸으니, 무럭무럭 자라나겠지? 올해, 아무래도 우리 가족 나무에 열매가 꽤 많이 열릴 것 같다.


... 분명 포근한 온도를 느낀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어느날 일어나보니 온 몸에 한기가 돌았다. 이정도로 추우면 한 해가 가버린건데.. 이상했다. 한 해가 이전보다 훨씬 더 빨리 흐른 느낌이었다. 추운 온도에 자연스레 몸이 시들해졌고, 간밤의 추위에 몸의 색도 벌써 노리끼끼해진 것 같았다.

아! 다른 가족들. 올해 태어난 내 동생 배꽃들은 어떻게 됐지? 온 몸을 떨며 간신히 몸을 돌려 본 그곳에는, 까맣게 죽어버린 내 동생들이 가득 있었다.


5월

오늘 우리는 또 이사를 간다고 했다. 여기저기 나무들을 열심히 돌아다니던 형제들이 다시 집으로 모였다. 왜 또 이사를 간대? 여기도 먹을 게 없대. 아, 벌써 몇 번째야. 나도 답답하고 배도 고팠지만 힘을 내서 아이들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이사가는 곳에는 있을거야! 좀만 더 힘내자!


열심히 날아 우리는 새로 이사하는 곳에 도착했다. 내려보니 탁트인 들판과, 사방에 만발한 꽃들이 눈에 띄었다. 아, 역시 희망은 있었던거야! 이 꽃들에는 꿀이 있겠지. 여기라면 우리가 정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평하던 형제들에게 나는 말했다. 봐, 여기는 있을거라고 했잖아.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하루하루 시간을 아껴 열심히 꽃들 사이를 날아다녔지만 아무리 봐도 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꽃이 많은데 먹을 게 없다니. 굶은지 시간이 꽤 되었던터라 점점 몸에 힘이 빠졌다. 나보다 어린 형제들은 벌써 먹을 것 찾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우리는 다 죽고말거야, 절망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없는 힘까지 짜내 날아다닌 덕분에, 나는 드디어 넓은 들판에서 살아있는 배 꽃 한 송이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도 시들시들하긴 마찬가지였다. 배가 고파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 모습을 보니 다짜고짜 꿀을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얘야, 우리 며칠 전에 이사왔는데. 여기.. 어떻게 된거야? 그 아이는 나를 보더니 울기 시작했다. 몰라. 따뜻해서 눈을 떴는데, 갑자기 너무 추워졌어. 1년이 쏜살같이 지나갔어. 내 동생은 올해 처음 태어났는데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하고 죽었어. 이상하다, 아직 1년은 지나가지 않았는데. 나는 그 애를 토닥여주었다.


6월

올해 배 농사는 끝났다. 4월 초에 갑자기 기온이 올라 녀석들이 피어날 때부터 불안했는데, 그 후로 갑작스레 기온이 확 떨어져버렸다. 떨어진 기온에 꽃들이 모두 시들어서 죽고 말았다. 몇 년 새에 이런 이상한 현상이 점점 더 심해져만 간다. 한 해 한 해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배꽃을 찾아온 양봉업자 김씨에게도 줄 수 있는 꿀이 없었다. 김씨도 나만큼이나 어려운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다른 집도 다 그렇던데, 저번 아카시아 꽃밭에서도 벌들이 굶었다네. 김씨는 허망한 표정으로 다른 밭을 찾아 떠나갔다.

첫째, 둘째와 함께 커간 내 배들, 자식 만큼이나 정성들여 키웠고, 내 아들들을 키워준 소중한 아이들인데. 셋째 딸을 위해서는 이 녀석들을 아무래도 포기해야할 것 같다. 틀어놓은 TV 속 홈쇼핑에서 쇼호스트들이 샤인머스캣이라는 것을 맛있게 먹고 있다. 아내가 말하길 이미 박씨네도, 이씨네도 배밭을 갈아엎고 샤인머스캣 작농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나도 다시 시작을 해야할 것 같다. 셋째를 위해서라도.



... 그렇게 동네의 마지막 배밭이 사라진다.





https://m.khan.co.kr/environment/environment-general/article/202007070600015

http://www.segye.com/newsView/20220315506595

https://www.khan.co.kr/environment/environment-general/article/202203310600031/?nv=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sub_thumb1&utm_content=20220331060003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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