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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ke Kim Sep 13. 2015

Univers, across the universe

'아드리안 프로티거'를 추모하며

아래에 이어지는 글은 월간 'ARENA HOMME' 매거진 6월호에 연재된 '글자를 위한 글'입니다.

2015년 9월 12일. 아드리안 프루티거의 타계를 아쉬워하며 그가 만든 최고의 폰트인 Univer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R.I.P. Adrian Frutiger





공자가 쓴 논어에 보면 이러한 말이 있다. "지지자(知之者)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 호지자(好之者) 불여낙지자(不如樂之者)" 해석하자면 ‘알기만 하는 사람(천재)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타고난 천재인 사람이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즐기기까지 한다면 어떨까? 그의 작업물들을 만나는 것이 시대의 축복이고 그의 인생 한걸음 한걸음이 역사의 현장이 아닐까?


오늘 소개할 유니버스(Univers)는 바로 아드리안 프루티거(Adrian Frutiger 1928~)라는 천재가 만들어낸 시대의 역작이며 현대 디자인사에 있어 폭넓게 사랑받은 중요유산이다.


1928년 3월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인터라켄 근처의 마을에서 태어난 아드리안 프루티거는 직조공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일을 도우며 글씨나 문양 등 공예에 관련된 시각적 기초 지식을 자연스럽게 배우며 자랐다. 그러한 초기교육은 아드리안 프루티거가 그림과 조각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레터링(글자를 그리는 것)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기반이 되었다.


16세가 되었을 즈음 프루티 거는 인쇄소 식자공으로 도제수업을 받으며 취리히 미술 공예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이 기간에 만든 레터링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큰상을 받으며 외부에 소개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드리안 프루티거는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프랑스의 가장 큰 활자회사였던 드베르니 에 페뇨사(Deberny et Peignot)의 디자인 디렉터로 파격적인대우를 받으며 스카우트된다.



아드리안 프루티거는 드베르니 에 페뇨사에 디자인 디렉터로 있으며 날카로운 세리프(serif)를가진 ‘Président’, 고전적인 느낌의 ‘Phoebus’, 그리고 손글씨 서체 ‘Ondine’이라는 3가지 서체를 제작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도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눈여겨 본 샤를르 페뇨(Charles Peignot, 1897-1983)는 당시 기계식 활자에서 사진 식자방식으로 서체를 전환하는 중요사업에 프루티거를 투입하게 된다. 루미타입(Lumitype)라 불렸던 장비를 위해 프루티거는 전통적인 서체들인 가라몬드(Garamond), 바스커빌(Baskerville), 보도니(Bodoni)를 새롭게 다듬었으며 그의 첫 번째 주요 서체인 메리디엔(Méridien)을 디자인하게 된다. 이 서체는 전통 서체들의 심미적인 면과,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글자의 구성과 화합, 형태에 대한 유기적 표현 등에 대한 모든 요소를 모두 겸비하고 있다.

 

메리디엔(Méridien) : 출처 www.fonts.com
이집티앙(Egyptienne) : 출처 www.fonts.com


그 후, 1956년. 그는 클라렌돈(Clarendon)에 기반한 첫 번째 슬라브 세리프 서체 이집티앙(Egyptienne)을 디자인하게 된다. 이 서체는 앞서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글자가 가진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작업이었다. 또한 서체의 역사에 있어서 도금 속 활자에서 사진식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과정에서 처음으로 커미션을 받은 기념비적인 본문용 서체였다.


많은 산세리프체의 기본이 되었던 악치덴츠 그로테스크


아드리안 프루티거의 적극 후원자 였던 샤를르 페뇨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금속활자와 사진식자에 걸쳐, 하나로 통합된 서체군(Family font)를 만들고자 하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전쟁 후의 시대적 상황을 잘 나타내는 푸투라(Futura)의 성공은 그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고 다시 한 번 푸르티거에게 푸투라(Futura)에 대적할 만한 기하학적 산세리프체를 디자인하도록 주문한다.

푸투라(Futura) : 출처 www.fonts.com


그러나 프루티거는 샤를르 페뇨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푸투라의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획일적인 기하학(geometry) 구조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프루티거는 조금 더 현실적인 신(新) 그로테스크(neo-grotesque) 바탕으로 서체를 디자인하기 원했고, 그렇게 프루티거에 의해 선정된 서체 모델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Akzidenz Grotesk)라는 서체였다.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유니버스의 서체 디자인과 유니버스 팔레트라 불리는 창의적인 서체 시스템이었다.

UNIVERS typeface


1957년 세상에 선보인 유니버스(Univers)는 기존에 푸투라(Futura)와 악치덴츠 그로테스크(AkzidenzGrotesk)가 가진 획일성이라는 기본 테마 위에 작업하였으나, 그의 획일성은 다른 서체들의 기계적인 획일성에 비하면 더욱 미묘하게 아름다웠고, 인간다웠으며, 결과적으로는 보기에 편안하게 만들어졌다. 프루티거는 아주 가볍고 연한(Light) 서체에서부터 진하고 두꺼운(Black), 압축된 것(Condensed)에서 늘려진 것(Extended)에 이르는 21가지 버전의 유니버스를 디자인하며, 엄격한 규율을 세우고 그에 따라 순차적으로 작업했다. 어떠한 버전이든 한 단어 안에서라도 서로 잘 매치가 되도록 조화롭고 미려하게  디자인되었으며 이런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매우 작은 요소에서부터 극단적인 것까지 어우르는 어울림을 만들어 냈다.

UNIVERS family


유니버스의 가장 혁신적인 점은 활자 패밀리에 부여된 체계적인 숫자 코딩 시스템이었다. 프루티거는 서로 다른 활자의 굵기와 폭 이탤릭에 각기 숫자를 부여했는데 이 기준은 1부터 9까지 숫자의 중심인 5로삼고 활자의 굵기와 폭을 동시에 전달하기 위해 두 자리의 숫자를 조합하였다. 기준이 되었던 유니버스55의 앞자리는 획의 굵기를 나타내며 뒤의 숫자는 활자의 폭과 비례에 따라 숫자를 부여하였다. 또한 이탤릭(기울어짐)은짝수 번호로 표기하였다. 예를 들어 유니버스55보다 글자가획이 더 얇고 폭이 좁은 서체는 유니버스 47, 획이 더 두껍고 폭이 두꺼운 이탤릭 서체는 유니버스62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암호처럼 들리겠지만 실제 서체를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위사진참조)


이러한 혁신적인 시스템은 기존에는 없던 것이었다. 이당시 대부분의 서체들이 금속활자로 제작되다 보니 굉장히 많은 돈이 들어갔고 서체 제작소들은 우선 시장성을 알아보기 위해 레귤러, 이탤릭, 세미 볼드 정도의 기본이 되는 3가지 서체를 제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금속활자를 만드는 것보다 저렴해진 사진식자 방식은 유니버스의 독창적인 21개의 서체 시스템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유니버스가발표된 이후 헬베티카(Helvetica)를 비롯한 다양한 산세리프 서체들의 패밀리를 구성하는 데 표준이되었다.

막스빌이 작업한 뮌헨올림픽 포스터


유니버스와 헬베티카는 종종 서로 비교되며 다양한 디자이너들의 취향에 따라 사용되는데 헬베티카와 유니버스의 다른 점을 꼽자면 둘 다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에 기반하여 만들어 졌으나 유니버스는 기존에 남아있던 옛스러움을 걷어내고 글자 하나하나 글자에 조형적인 완성도를 최대한 추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유니버스는 논리적이며 중성적으로 보이는헬베티카에 비해 매우 이성적인 서체이면서 우아함이 녹아있는 독특한 서체인 것이다. 서체 제작사인 라이노타입(Lino-Type)은 유니버스에 대해 “20세기 중반 이후로 가장 훌륭한 타이포그라피 성과”라 칭송한다. 유니버스의 서체군은거듭 강조하듯, 여러 가지의 두께와 스타일이 한번에 사용 되더라도 그 안정성과 동질성을 유지한다. 또한 유니버스의 깔끔하고, 이성적인 형태는 서체의 가독성을 높여 주기때문에, 어떤 디자이너가 어떤 타이포그라피에 사용되더라도 그 어우러짐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에밀루더의 포스터


6-70년대 서구 타이포그래피 교육의 기본이자 실험의 산실이었던 스위스 바젤 디자인 학교의 교수였던에밀 루더(Emil Ruder ,1914~1970)는 유니버스의 적극적인 예찬론자 였다. 유니버스라 불리는 믿음직한 서체 팔레트는 그에게 창조적 영감이 되어 스승인 얀 치홀트를 뛰어넘는 여러가지 독창적이며 창조적인 타이포그래피 실험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우아하고 현대적인 품위가 느껴지는유니버스는,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장 많이 사용된 산세리프 서체로 알려져 있다. ‘Universe(우주와 만물, 존재하는 모든 것과 그 공간)’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떤 목적이나 매체에 사용되어도 무난한 서체이기 때문이다.원칙적이고 체계적인 디자인 덕분에 수많은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성공 요인이다. 특히유니버스는 페덱스(Fedex)와 이베이(e-Bay), 스위스국제항공사(Swiss International Air Lines)의 로고 등 우리에게 익숙한 다양한광고나 브랜딩, 영상 스크린과 기업의 CI, BI 제작에널리 활용되어 왔다.






유니버스의 큰 성공은 푸루티거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프루티거의 천재적인 디자인 감각은 여러 클라이언트와 서체회사에게 인정받으며 다양한 의뢰가 이어졌고 현재까지그가 발표한 서체는 약 30종에 이른다.


Ondine(1954), President(1954,) Meridien(1955), Egyptienne(1956), Univers(1957), Apollo(1962), Serifa(1967), OCR-B(1968), Iridium(1975), Roissy(for Charles de Gaulle Airport1972, Linotype 1976), Frutiger Glypha(1977), Icone(1980), Breughel(1982), Versailles(1982), Linotype Centennial(1986), Avenir(1988), Westside(1989), Herculanum(1990), Vectora(1990), Linotype Didot(1991), Pompeijana(1992), Rusticana(1993), Frutiger Stones(1998), Frutiger Symbols(1998), LinotypeUnivers(1999), Frutiger Next(2000), Nami(2006), Frutiger Arabic(2007), FrutigerSerif(2008), Neue Frutiger(2009) 등..


세리프 서체부터 산세리프서체와 기업을 위한 전용폰트, 다소 익살스러운 폰트까지 프루티거가 손대지 않은 서체가 없었고 각각 서체의완성도는 하나하나가 역사에 남을 만큼 뛰어났다. 프루티거의 가장 큰 장점은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하고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또한 최신 트랜드를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결합 함으로써 시간을 거스르는감동을 대중에게 전달했다.


그가 제작한 서체는 전통에서 뿌리를 찾았지만, 현대적인 것과 어우르는 유연성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아무나갖는 것은 아니지만 겸손하고 차분한 그의 성격과 자기 반성적이고, 서체 디자인을 대하는 집중력, 어떠한 주어진 상황에도 초점을 잃지 않는 능력은 훌륭한 서체를 만들어 내는 결과가 되었다.


2003년 아드리안 프로티거가 디자인한 Ventura사의 한정판 시계


아주 작은 디테일이 우주를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4포인트(pt)의 서체에서 조차 정제된 디테일을 추구했던 프루티거의 집요함은 결국 지구 곳곳에 자신의 작업 결과물들이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우주(Universe)처럼 세상 만물을 담고자 했던 프루티거의 꿈은 유니버스(Univers)를통해 이뤄졌다.


천재이면서 꾸준히 노력하고 자신의 일을 즐겨왔던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으랴? 결국 단 한 명의 천재가 세상을 바꾼다. 아마도 아드리안 프루티거가아니었으면 세상은 조금 더 단조로워졌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고 있는 수많은 디자인들의 기반이 될 서체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Adrian Frutiger 1928~2015

글 : 오영식(토탈임팩트), 김광혁(VMK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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