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역사와 함께한 폰트계의 포리스트 검프.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인 IBM, ABC(American Broadcasting Company), UPS와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후 설립한 NeXT Computer의 로고 디자인을 하였던 미국 디자인계의 대표적 인물인 ‘폴 랜드(Paul Rand, 1914-1996)’는 "신(新) 타이포그래피가 달성한 것 이상을 이룩한 것은 그 후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말하며 신 타이포그래피 이론을 만들어낸 독일의 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퍼 ‘얀 치홀트(JanTschichold, 1902-1974)’를 칭송한 적이 있다.
폴 랜드가 이야기한 얀 치홀트는 1902년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이자 간판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1923년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인쇄회사인 휘셔운트 비티히에 취업한 후 바이마르에 위치한 바우하우스에서 열린 전시회를 보고 감명을 받아 새로운 구성주의 디자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현대적인 타이포그래피의 역사는 흔히 얀 치홀트가 러시아의 대표적인 구성주의 화가인 엘 리시스키(El-Lissitzky 1890-1941)의 영향을 받아 신 타이포그래피를 만들어낸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그렇다면 신 타이포그래피는 과연 어떠했길래 역사적 구분점이 되었는지 알아보자. 얀 치홀트가 과거의 편집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조잡하고 너무 장식적이라 규정하며 타이포그래피의 중요 요소로 강조한 것은 아래와 같다.
1. 글을 배열(디자인) 하기 전에 글에 대한 내용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2. 글은 읽기 쉽게 배치되어야 하며 어떻게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는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글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을 읽기 쉽게 만드는 것만큼 인쇄에 기술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알맞은 디자인도 중요하다.
이 세 가지 법칙은 어느 하나 놓쳐서는 안되며 보기만 좋고 읽기 힘들었던 기존의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정면으로 반박한 내용이었다. 또한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디자인 역시 예술이라 부르면 안된다고 하며 디자이너들의 장인정신을 고취시켰다. 함축하여 말하자면 ‘글자의 내용을 전달함에 있어 명쾌함과 심플함이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당시 만연했던 장식주의 성향의 디자인과는 전혀 상반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는 과거의 타이포그래피가 내용이나 형식으로 볼 때 여러사람이 여유를 갖고 차근차근 시간을 내어 읽을 수 있었던 시대를 지나 인쇄의 발전과 함께 대량으로 싼 가격에 인쇄되는 책을 빠른 시간에 개개인이 싸게 구입해서 정보를 입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던 것에서 비롯된다. 결국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타이포그래피에 있어서 내용이라는 본질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된 것이다. 신 타이포그래피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편집디자인에 있어 시대적 흐름과 잘 부합하였고 대량 생산되는 인쇄의 본질을 꿰뚫어본 시대적 통찰력이 담겨있는 이론이었다.
오늘 이야기할 악치덴츠 그로테스크(Akzidenz Grotesk)는 이름 자체로도 생소하고 한국어로 발음하기도 어려운 서체이지만 신 타이포그래피의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서체다. 얀 치홀트가 가장 사랑했던 서체이고 당시 신 타이포그래피의 이론에 부합하는 굉장히 명쾌하고 심플한 서체였기 때문이다.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는 이름 자체로 들으면 무언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멋진 느낌이 나지만 그 의미를 단어별로 분리해서 해석해 보면 굉장히 시시할 수도 있다. ‘악치덴츠’는 인쇄물의 디자인인 편집디자인을 뜻하며 ‘그로테스크’는 앞선 칼럼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던 산세리프(sans serif: 로마자 알파벳 서체 디자인에서 세리프는 획의 시작과 마무리 부분에 튀어나온 돌기. 세리프 서체는 한글의 명조 계열 서체, 산세리프 서체는 고딕 계열 서체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를 뜻한다. 그 뜻을 합쳐서 설명하자면 ‘인쇄용 산세리프 서체’라는 정도의 의미다.
이 서체는 만든 이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19세기 초반에 등장한 대부분의 산세리프 서체들이 그러하듯 이 서체 역시 대중에게 익숙한 서체였지만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최초의 배포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과거에 다소 멋없다고 생각된 모던한 활자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16년 영국의 캐슬론 활자 주조소의 활자 견본집이었다. 이 활자 견본집에 담겨있는 초기의 산세리프 서체들은 불규칙하고 다듬어지지 못한 굵기와 어설픈 곡선 처리 등이 눈에 띄었는데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는 그러한 문제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잘 다듬어진 서체다. 세리프의 거추장스러운 장식요소들을 모두 걷어내고 알파벳의 모양이 가져야 할 가장 심플한 형태를 제시하며 굉장히 새련되게 디자인되었다. 또한 들쭉날쭉했던 굵기와 글자의 폭은 한층 정리되었고 고른 리듬감과 활자와 여백의 공간미를 살렸다.
악치덴츠 그로테스크가 신 타이포그래피 운동에 알맞은 서체로 채택되어 대중에 저변화되었던 것은 악치덴츠 그로테스크가 고유하게 가진 중립성에 그 이유가 있다. 장식적인 요소가 줄어듬으로 인해 디자이너 개인의 성향이 드러나지 않았고 그 글자체가 담긴 인쇄물의 내용에 개인적인 성향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고 정보를 전달받는 독자들은 내용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정보전달의 명쾌함을 기본으로 한 신 타이포그래피 이론에 걸맞는 서체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신 타이포그래피의 주창자인 얀 치홀트가 과거와 결별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서체는 산세리프 서체뿐이라 강조하고 1928년 자신의 저서인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의 본문용 서체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스러움과 히틀러의 게르만 족의 우수성을 통치기반으로 삼은 나치의 제국주의는 러시아의 구성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 타이포그래피 이론과 이 이론에 기반한 교육을 펼쳤던 바우하우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모던한 구성주의를 표방했던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표적이 되어 해체되게 되었고 뿔뿔이 흩어진 바우하우스의 인물들은 이를 계기로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낸다.
모던 타이포그래피(디자인) 운동이 여러 국가로 흩어지게 될 때 신 타이포그래피 정신은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테오 발머(Theo Ballmer 1920-1965)와 막스 빌(Max Bill 1953-1968)과 같은 스위스의 디자이너들을 통해 강한 생명력을 가지며 이어졌고 이들에게도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특히 막스 빌은 1950년부터 56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육적 이상을 재현하고자 설립된 독일의 울름(Ulm) 조형대학의 학장을 역임하면서, 수학적 접근에 의한 순수한 형태의 추구와 아름다움이라는 그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전파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의 바젤(Basel)과 취리히(Zurich)를 중심으로 모던 디자인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스위스 모더니즘은 정보의 객관적이고 명확한 전달이라는 목표의 수행을 위해 중립적이고 분명한 목소리를 가진 산세리프 서체를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수평과 수직의 정돈된 수학적인 법칙을 그래픽 디자인에 적용한 테오 발머는 화면의 구성에 있어서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그리드 시스템(Grid system)을 도입하였는데 그리드 시스템은 현재 우리가보고 있는 컴퓨터 화면의 웹디자인과 모바일 디자인에도 공헌한 바가 크다. 바로 그 막스 빌과 테어 발머가 사랑한 서체 역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였다.
1950, 60년대에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교수인 현대 모던 타이포그래피의 많은 이론을 정립한 에밀 루더(Emil Ruder), 아민 호프만(ArminHofmann), 요셉 뮬러 브로크만(Josef Muller Brockmann) 등에 의해 전개된 스위스 모더니즘은 얀 치홀트의 신 타이포그래피 전통을 이었으며 이들 역시 주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를 그들의 작업에 사용하게 된다.
이후 스위스 모더니즘의 산실이 되었던 바젤 디자인 학교(Basel Schoolof Design)는 1968년 에밀 루더의 제자였던 27살 천재 교수 볼프강 바인가르트(Wolfgang Weingart)를 신임교수로 임용하게 된다. 당시 볼프강 바인가르트는 그가 받은 스위스 모더니즘 교육에 의문을 품고 신 타이포그래피에 기초한 이론에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형태 창조 가능성을 테마로 연구와 실험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스위스 모더니즘의 ‘차갑고 중립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실험적이고 자기표현적인 접근’을 통해 각자의 목소리를 가질 것을 학생들에게 교육을 시도했고 바인가르트교수 개인의 타이포그래피 작업과 교육은 급진적이었으나 그가 받은 모더니즘 교육의 커다란 테두리 속에서, 발달한 기술과 시대에 알맞게 모더니즘의 형태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는 모더니스트와 같이 하나의 작업에 하나의 서체 패밀리만을 사용했으며 그의 타이포그래피 실험의 주재료는 악치덴즈 그로테스크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19세기 말에 등장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가 끼친 영향은 아직까지도 계속 이어진다. 애플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전용 서체인 헬베티카(Helvetica)의 전신이 바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였다. 1957년 스위스 하스 활자 주조소에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를 발전시켜 출시한 서체인 헬베티카의 원래 이름은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Neue Haas Grotesk: 하스의 새로운 산세리프 서체라는 뜻)’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는 어찌 보면 포리스트 검프(Forrest Gump: 윈스톤 그룸의 1986년 동명 소설에 기반한 1994년 코미디 드라마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와 비슷한 서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서체였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이포그래피(디자인) 역사와 세계의 급변하는 세월에서 수많은 유명인들과 만나며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서체였기 때문이다. 강산이 변해도 악치덴츠 크로테스크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위 내용은 '아레나 옴므' 매거진. 2015년 2월에 연재된 '글자를 위한 글'입니다.
글 : 오영식(토탈임팩트), 김광혁(VMK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