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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ke Kim Mar 05. 2019

사바하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이야기

사바하는 한국에서 다소 어색한 오컬트 장르이고 곡성 이후에 다양한 메타포를 숨겨놓은 영화이기에 조금의 해석을 덧붙이고자 오랜만에 리뷰를 남깁니다.


오컬트 장르의 대표적 영화 엑소시스트


우선 오컬트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occult는 라틴어의 'occultus'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주로 신비학(神祕學) 또는 은비학(隱秘學)으로 번역되기도 하며 현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여러 신화, 전설, 민담 및 문헌으로 전승되는 현상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에 원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그러한 것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것을 말하기고 합니다. 쉽게 말해 신화와 같은 신비한 것들을 탐구하는 것, 비밀스런 경전, 악마와 마녀 등이 등장하는 미스터리 공포영화를 대체적으로 오컬트 장르로 나눕니다. 기존에 엑소시즘이 등장하는 영화도 종교적 신비주의를 다루는 오컬트 장르입니다.


사바하는 이런 오컬트 장르의 장단점을 종횡무진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불교적 신비주의 일파인 밀교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교리와 역사를 결합시켰으며 드문드문 샤머니즘까지 집어넣어 전체적으로 곡성과 같이 기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메타포(상징, 은유)를 담는 방식도 곡성과 비슷하게 다양한 종교를 크로스 오버시키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 만화 알면 아재... 일본의 밀교를 다룬 공작왕(孔雀王)


하지만 곡성과 다르게 메타포들을 쉽게 설명하거나 직접적으로 보여준 부분이 있어서 그리 해석이 어렵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생각보다 친절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후에는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들에 대해서 제가 아는 정도를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스포일러가 굉장히 많으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나중에 읽어볼 것을 권장해 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리뷰를 보신 후엔 영화를 보는 재미가 전혀 없을 겁니다.

사바하는 오컬트의 탈을 쓴 미스터리 스릴러에 가깝기 때문에 반전 요소와 인물들의 정체를 알고 나면 재미를 느낄 거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듭니다. 그러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으나 영화를 볼 분 들이라면 나중에 읽기를 권장드립니다.





영화 사바하는 크게 인간이 신이 되는 과정,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화 곳곳에 불교적 상징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메타포로서의 상징들. 즉 중의적 의미로써 기독교에선 다른 의미를 갖는 것들을 중첩시켜 종교의 근원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장치로 삼기도 합니다.



발목을 잡는 자

"나는 귀신과 함께 태어났다"

영화는 금화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금화와 그것은 쌍둥이로 태어나지만 그것은 탯줄이 없었기에 금화의 오른쪽 다리를 씹어먹으며 어미의 뱃속에서 생존을 하게 됩니다. 태어난 모습은 온몸에 털을 뒤집어쓴 짐승의 모습인데 이는 성경의 야곱의 일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 속 위인인 야곱은 태어날 때 쌍둥이 형의 발목(발꿈치)을 잡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름을 "발목(발꿈치)을 잡는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 불려집니다. 이는 당시의 의미로도 지금의 의미로도 '발목을 잡다 - 남일을 방해하다'라는 뜻이었으므로 꽤나 부정적인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야곱의 설화는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굉장히 중요한 스포일러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후에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합니다(창 32:24~32). 이때 개명된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하나님(신)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입니다. 불경하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이는 인간 한계를 넘어선 영웅을 뜻하기도 합니다. 금화와 같이 태어난 그것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사바하의 세계관에서 신이 될 자를 이길 자, 또는 발목을 잡을 아이라는 것이죠.



사악한 뱀과 초월의 뱀

영화에선 뱀의 존재를 반복적으로 각인시킵니다. 예언서를 남긴 김제석은 뱀을 사악하게 보고 없애야 할 존재라고 합니다. 이런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영화적으론 초기에 무당이 그것에게 접근했을 때 징그럽고 무서운 뱀이 등장해서 무당을 쫒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중의적 의미를 갖습니다.


기독교에서 뱀은 사악함을 뜻합니다. 선악과를 먹게 하고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며 지식을 빌미로 인간을 유혹해 타락시키며 발목을 물어 상처를 입힙니다. 하지만 불교의 뱀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불교의 뱀은 탈피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자를 뜻합니다. 또한 적을 한방에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독과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금세 아물어 버리는 놀라운 회복력을 가지고 있어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신으로 숭배받았습니다.


또한 불교의 뱀 신인 나가는 성스럽게 받들어지는데 석가모니가 보리수에서 수행을 할 때 큰 비바람이 몰아치자 큰 뱀의 신인 '무차린다'가 석가의 몸을 가려 비를 피하게 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나가는 경전을 수호하는 자로 불교 철학자 나가르주나를 자신의 왕국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나가르주나는 대승불교의 경전인《반야바라밀 다경》을 재발견했는데 고타마 붓다는 인간이 이 경전을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나가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불교적 진리인 경전을 수호하는 것이 바로 뱀이고 불교적 뱀은 기독교와 달리 성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영화의 말미를 보면 금화의 쌍둥이인 그것의 온몸에 털이 빠지고 뱀의 눈을 한 초월자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김제석이 두려워했던 뱀으로서 사악한 존재에서 탈피하여 성스러운 힘을 갖는 불도의 수호자가 됨을 의미합니다. 김제석의 사주를 받았던 정나한이 악몽을 통해 악령들을 두려워할 때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두었던 것도 그것이었던 것을 보면 처음부터 금화의 쌍둥이인 그것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선한 존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의 초반 뱀이 무당의 다리를 문 것은 단순히 악한 존재가 선한 존재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존재가 부정을 탈 것에 대비해 뱀이 부처(시다르타)를 지켰듯 그것을 보호하며 지킨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루어지소서

영화 사바하는 기독교적 종교관을 이야기하기보단 박웅재(이정재) 목사라는 화자의 눈으로 본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박웅재 목사는 영화 중 몰살당한 한 가족의 사례를 예를 드는데 뉘앙스로 보아 이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에서 다른 신을 믿는 테러리스트가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였을 때 과연 "나의 신은 어디에 있는가? 왜 그는 현현하여 세상을 굽어살피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후 박웅재 목사는 살아있는 신을 찾는 일을 시작하게 되는데 겉으로는 사이비 종교를 파혜치는 종교연구소를 운영하지만 실제로는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살아있는 신을 찾고 싶었던 것이죠.


이러한 박웅재의 모습은 마술사였던 제임스 랜디와도 겹치는데 한때 엄청난 마술을 보여줬던 제임스 랜디는 어느 날 마술과 사기로 돈을 벌고 세상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사람들을 사기행각을 폭로하며 실제 초능력자가 자신 앞에서 그 능력을 증명하면 100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합니다. 하지만 이후 여태까지 초능력자라고 자칭하던 자들이 죄다 사기꾼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으며 초능력자가 없음을 공공연하게 증명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임스 랜디가 바랬던 것은 아마도 초능력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설마라도 있을 초능력자를 발견하는 것이 었을 겁니다. 박웅재 목사 역시 사이비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초월자, 또는 신적인 존재를 만나 죽음과 믿음이라는 것의 진리를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사바하는 범어 진언의 'Svaha'를 한자로 음차 한 것인데, 사전적으로는 '잘 말했다.'는 뜻입니다. 흔히 진언의 뒤에 붙여 '옴마니 반메 훔 사바하~' 같이 말이죠 여기에 붙는 사바하는 ‘~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뜻을 뜻합니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와 비슷한 의미인데 불교에선 자신이 열반에 이르러 이루는 것을 말하고 기독교에선 유일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라는 뜻합니다. 영화에선 결국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걸 결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인 사바하는 기독교와 불교를 잇는 메타포를 담은 중의적 단어로써 작동하게 됩니다.



신이 된 사나이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인간이 신의 위치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이는 오랜 기간 수련을 통한 인간의 초월 즉 열반을 통해 가능해지는데 불교의 석가모니(싯다르타)가 바로 이런 열반을 통해 신에 근접한 자입니다. 물론 불교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뉘어 만민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느냐 아니면 나의 수행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느냐가 다르지만 그 근본에는 열반이 핵심이며 이 열반은 해탈(깨달음)을 통해 가능하게 됩니다. 불교의 중요 신화에서 대부분의 신적 존재들은 운명을 타고난 선택된 존재들도 있고 스스로 깨달아 천계에 머무는 자도 존재합니다.


기독교가 인간 - 메시아 - 신으로 인간과 신의 중간에 메시아가 있었던 반면 불교는 인간 - 열반 - 신의 단계로 인간이 수행을 거듭하면 열반에 이르러 신의 존재가 되는 것으로 크게 다른 지점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선 인간이 신이 될 수 없으나 불교에서는 인간도 신이 될 수 있으니 말이죠. 불교에서는 이러한 열반을 인간뿐만 아닌 무생물과 동물까지 이르러 다양한 종들이 열반을 통해 신의 위치에 다가서게 됩니다. 종교의 시작이었던 토테미즘과 애니미즘까지 포괄하는 꽤나 큰 세계관입니다.


이러한 고대 신앙은 한국에선 더 크게 포괄됩니다. 일반 무속신앙과 토속신앙에 따르면 천계에 있는 신 이외에도 인간을 초월한 자를 신으로 보기도 했고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 이상의 힘을 쓰면 신으로 추앙되곤 했습니다. 이런 신적 존재엔 이무기와 용도 있는데 한국에서 용은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뱀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다시 용이 되는 것으로 봤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영화 사바 하속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더불어 불교에는 미륵불 신앙이 있습니다. 미륵불은 설명할 내용이 또 많으나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미래에 올 부처를 말합니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이후 56억 7천만 년이 되었을 때 혼세가 오면 나타나는 다시 나타날 부처이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한국에선 이 미륵불에 대한 전승과 믿음이 많습니다. 하지만 토착신앙과 미륵불 사상이 결합하며 정도령을 위시한 다양한 사이비 종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물론 영화의 메타포로 설명하자면 "과연 김제석과 그것 중 미륵불은 누구인가?" 정도로 미륵불의 내용도 함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처음에 이야기했듯 뱀의 존재로 그 진위를 나눌 수 있습니다. 무당이 그것이 있는 곳에 갔을 때 뱀의 공격을 받는데 뱀은 불교적으론 부처를 지키는 존재입니다. 고로 그것이 바로 미륵불인 것입니다.



뱀이 용 되고 용이 뱀 되다

사바하에선 마지막 박웅재 목사가 김제석의 타락을 보고 "용이 뱀 됐네"라는 말로 함축합니다.


처음엔 사이비로 보았으나 모든 종교인들이 '진짜'라고 일컫는 김제석을 두고 박웅재 목사는 의문을 품습니다. '과연 인간이 110살 이상 생존할 수 있겠냐?'는 의문으로 시작하여 종교적으로 완전무결한 교리와 가르침을 이룬 자가 왜 타락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결국 김제석은 늙지 않는 불로의 몸은 가졌으나 불사의 단계까진 가지 못한 이무기의 존재로 다음 단계의 열반을 맞이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으나 자신의 욕망(생-살아있음)에 굴복해 타인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간 존재로 묘사됩니다. 결국 박웅재 목사가 말한 "용이 뱀 됐네"는 반대로 금화의 쌍둥이인 그것이 "뱀에서 용 됨"으로 반전하여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게 됩니다.


한국 신화 속에는 두 개의 다른 속성을 가진 이무기가 등장합니다.

우선 대다수가 알고 있는 이무기는 수(水:물) 속성으로 비와 바람을 부릴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알고 있는 것과 반대로 이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는 악한 존재가 아닙니다. 때로 인간을 돕기도 하고 인간의 꾐에 넘어가 인간을 이롭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강철이'라고 불리는 악한 이무기도 있습니다. 강철이는 용이 되는 데 실패한 이무기가 타락한 요괴로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등장하는 유명한 요괴입니다. 몸에서는 맹렬한 열기나 불을 뿜어내어 산천초목을 모두 말려버리고 구름을 마르게 하여 가뭄을 일으키며 우박을 동반한 폭풍을 일으키는 존재로 물에 들어가면 부글부글 물을 끓게 할 정도로 화(火:불)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김제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자신의 신력을 보여주기 위해 펄펄 끓는 온천에 몸을 담갔다가 멀쩡히 나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자신의 해탈을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일 텐데 그 시작은 온천 즉 물이었던 것은 이무기가 가진 힘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후 김제석은 뱀에서 이무기가 되었다가 승천(열반) 하지 못하고 타락한 강철이가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조금 비약을 하자면 영화의 말미에 김제석이 불에 타 죽는데 여기에는 이무기의 전설이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가 결국 승천하지 못하고 타락하여 불에 타 죽는 건 선한 이무기가 강철이가 되는 비참한 운명이었던 것이죠.


덧붙이자면 김제석은 부처가 아닌 용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처는 열반을 한 절대자를 뜻하지만 용은 현세의 왕, 즉 권력과 부귀영화를 뜻하니 말이죠.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미륵은 혼세에 나타난다

앞서 이야기한 미륵불의 존재와 더불어 메시아의 구조, 불교적 이야기를 합쳐보면 불교에서 부처는 연꽃에 비유되는데 연꽃은 더러운 곳에서 태어나 향기를 품고 피어 더러운 연못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김제석은 그런 과정이 없었으나 그것은 더러운 곳에서 세월을 보내고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의 아마겟돈은 적그리스도와 새로운 메시아의 탄생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적그리스도는 마치 그리스도의 재림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미륵불은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륵불은 스스로 각성하기 전까진 악귀를 몰고 다니며 인류를 위협하다가 각성과 해탈을 통해 메시아(구원자)가 되어 인류를 구원합니다. 김제석이 행했던 악행을 둘러보자면 아마 스스로 미륵불이라 믿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악행을 저지르며 악귀들의 왕을 자처하지만 그것 역시 미륵의 운명이라 되뇌며 당위성을 찾았을 겁니다.


조금 덧붙이자면 김제석의 이름에서도 감독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영화의 중반까지 미스터리의 주체였던 사슴 동산과 사천왕의 존재는 영화의 중후반이 넘어가며 김제석의 거처인 녹야원으로 확장되는데 이 사슴 동산 즉 한자로 녹야원(鹿野園, Sarnath)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과거의 동료였던 다섯 수행자(꼰단냐, 밧디야, 왑빠, 마하나마, 앗사지)를 찾아가 첫 설법을 행한 곳입니다. 사천왕의 보위를 받는 교주의 이름이 김제석인 것을 보자면 제석천 즉 힌두교의 뇌신 인드라를 뜻합니다. 김제석은 영화에서 가장 다양한 메타포를 담고 있는데 부처, 미륵불, 메시아, 제석천 모두 사실은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를 뜻합니다.


(참고적으로 미륵은 범어로 मैत्रेय, Maitreya라 쓰는데 이는 고대 페르시아의 신인 미트라가 구전되며 힌두교, 그리스에 다양하게 파생되게 된다. 페르시아인들은 미트라가 태양의 신으로서 진리와 용기와 법을 지킨다고 믿었다. 사실 미륵은 초기에는 불교와 큰 관련이 없었다)


정나한 - 광목천왕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사천왕중 마지막 남은 정나한의 법명은 광목입니다. 광목천왕을 뜻하며 다른 사천왕과 마찬가지로 도리천에 기거하는 제석천을 받들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광목천왕의 피부를 백색으로 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광목천이 속한 서쪽에 색목인이 살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게 전승되어 형상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정나한의 머리가 노란색인 이유는 이러한 광목천왕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영화의 말미에 타락한 메시아인 김제석이 코끼리의 눈을 정나한에게 보여주며 옛 인도에서는 코끼리의 눈을 보고 공포를 느끼면 마음이 악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과거의 왕들은 코끼리의 눈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시 정나한에게 "너는 왜 이(코끼리) 눈이 두렵지 않느냐?"라며 자신의 타락됨을 빗대어 말합니다. 이미 김제석은 코끼리의 눈이 두려워졌으며 스스로 마음이 악해졌음을 비탄해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 해탈하여 열반에 이를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심에 물들어 욕망과 욕구를 채울 미래만 생각할 뿐이었을 겁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김제석의 육손(다지증)


완벽한 여섯과 아홉

아마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김제석은 신이 된 사나이라며 왜 죽냐?'라는 의문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김제석은 신에 근접한 자일뿐 신이 되진 못했고 불로불사가 아닌 불로의 단계만 가지고 있습니다. 억지로 의도된 설정이겠지만 김제석은 태어날 때부터 육손(다지증)이었는데 육손은 여러 전설이나 설화를 통해 때로 불경하게, 때론 신성하게도 여겨졌는데 사바하에서는 불경과 신성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두었습니다. 불교의 수비학을 보더라도 육은 천계와 세상을 떠받치는 육도의 수이기에 완벽한 수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고통받는 원인이자 해탈을 방해하는 삼독(三毒)과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痴) 및 총체적인 고통과 즐거움을 상징화한 수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김제석이 육손인 이유는 단순히 인간을 초월한 자를 보여줌과 동시에 말미에는 저주받은 그것과 서로 연동된 운명임을 암시하는 것일 테지만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징들을 특별히 봤기에 감독이 그냥 단순히 쓰이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실제로 시베리아 바이칼호 근처에 사는 부랴트 몽골족은 다지증을 샤먼으로 삼는 풍습을 가지고 있으니 김제석의 육손과 초자연적인 불로의 초월성은 어느정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또한 영화에선 김제석이 사천왕을 통해 살해를 명하는 81명의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81이란 숫자는 9가 9번 겹친 수입니다. (9x9=81) 불교에서 9는 10이 되기 전 완벽한 한자리 수로서 부처의 삼보(三寶) 중 법(法)을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로 상징되며 진리의 통달을 뜻합니다. 즉 김제석이 9가 9번 겹친 81개의 암호를 적었다는 것은 불교적 완벽한 수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달리 말하면 81이라는 완벽한 수를 타고난 아이는 초월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맥거핀

사실 이 영화에는 특별히 의미가 없지만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영화적 용어로 이러한 사물과 등장인물들을 맥거핀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맥거핀들은 영화를 해석하거나 관객이 영화의 다음 장면을 예상하는데 혼동을 주어 이후의 스토리를 예상하지 못하게 하거나 반전을 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바하에 등장하는 동물인 염소, 까마귀는 억지로 하자면 의미부여가 가능하긴 하지만 사실 큰 흐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초기에 등장하는 소들의 떼죽음도 사실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염소의 울음과 소들의 떼죽음은 마을에 새로 이사온 그것이 악한 존재임을 의미하나 그 외에 그다지 큰 종교적 의미적 메타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금화의 할머니가 자신의 몸을 때리며 기도를 읊는 장면도 사실은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장치와 장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하는 역할을 할 뿐 그 자체로 해석할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사슴이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불교에서 사슴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갖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부처의 거처였던 녹야원은 부처가 이름지은 것이 아닌 부처(싯다르타)의 전생에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부처의 전생은 큰 사슴(사슴의 왕)이었는데 부처가 윤회를 거듭하며 깨달은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생에 새끼를 밴 사슴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희생을 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영화에선 김제석이 자신의 사슴 동산에 있던 사슴의 죽음을 보고 애달퍼하는데 이는 불교의 설화가 생각나서였을 겁니다. 부처는 전생에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다음 생에 열반을 이뤘지만 김제석은 절대 자신을 희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죠. 현생에서 자신의 영생에 집착하고 미륵을 자처하니 인간을 벗어나 해탈을 해도 스스로 진정한 부처가 되는 열반을 할 수 없음을 한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시다르타와 사슴이야기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331)

김제석은 자신의 타락됨을 이미 알았으니 그 것만큼 비통한 것이 없었겠죠.


이것이 있기에 그것이 있다

사실 영화의 가장 큰 주제인 연기설 즉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그것이 멸한다.”라는 불설(佛說)도 설명하고 싶으나 이미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앞서의 정보만으로도 숨이 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불교에선 이런 연기를 깨닫는 것을 법을 깨우쳤다고 보았는데 이 법이란 것은 진리를 말합니다. 연기란 인연의 이치를 말하는데 이 연기를 깨달으니 세상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됩니다. 이를 깨달으면 해탈할 수 있으니 그걸 깨우친 자가 바로 김제석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불멸과 더불어 필멸할 것의 탄생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열반할 수 있을지도 몰랐을 것을 운명을 거스르려 했기에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이 연기설에 빚대어 조금 다른 말을 하자면 불교적 이치로 세상 모든 것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있고 내가 잘못된 이유가 있으며 내가 잘되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의 반대엔 항상 지금의 현상과 다른 것이 존재합니다. 누군가 부유하면 누군가는 가난해야 하고 누군가 행복하다면 누군가는 불행하며 세상 모든 것은 이렇든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됐을 때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평등하지 못하기에 어두운 곳에 나에게 있는 조금의 빛을 비추는 것이 바로 자신의 복에 화를 부르지 않고 해탈에 이르는 길인 겁니다.





이상 영화에 나타난 다양한 메타포와 종교적 의미에 대해 조금 모자란 해석을 마칩니다. 과연 이 길고 지루한 글을 끝까지 읽은 분이 얼마나 되실지 의문이 들긴 합니다. ㅎㅎ


전문지식이 아닌 제가 아는 범위의 내용과 인터넷 정보, 불교사전의 힘을 빌려 쓴 글이라 해석의 오류나 개인적인 사견에 따른 비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 이런 것이 있구나~ 정도로만 보아주심 감사할 것 같습니다.


영화적 평을 조금 하자면 곡성과 비견될 영화는 아니지만 곡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영화였고 앞으로 다시 사바하 때문에 이런 오컬트 장르가 지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영화가 아닌가도 싶습니다. 한국에서 희소 장르였던 오컬트 공포를 콘셉트로 끌어온 점도 그렇고 메타포의 활용도 비슷한 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해석 없이는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곡성과는 반대로 관객이 영화를 보며 충분히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정재뿐만 아니라 진선규, 박정민, 이재인의 연기가 굉장히 좋았기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의 짜임새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지루하다고 다큐 같다는 평이 있고 결말에서 조금 힘이 빠진다는 평도 있으며 오컬트의 색채가 약해서 아쉽다고도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런 구성이 괜찮았다고 봅니다. 감독이 미친척하고 곡성처럼 끝까지 아무 설명 없이 몰아붙였다면 장르 영화적 힘은 더 있었을지 모르나 대중에겐 외면받기 쉬웠을 주제이니 말이죠.

장재현 감독의 전작도 만족하고 봤지만 이후의 영화들이 더 기대되는 영화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런 영화가 한국시장에 더 많아지길 바라기에 악평보다는 응원을 더 보내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다음작에선 검은 사제들과 연동되는 세계관도 보여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날까지 응원합니다. 화이팅!


사바하의 장재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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