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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Jan 19. 2016

제목 없음 4.

네 번째 이야기. 언니는 내게 ○○였다.


나는 부산함과 고독함에 익숙해져야 했다.

꽤나 모순적인 이 두 단어가 아무렇지 않게 융화되는 공간.

우리 집은 꽤나 이상한 곳이었다.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곳이 되어버리는, 마법학교 같은 그런 공간이었다.


언니와 함께 따스한 햇살을 맞이하며 눈 뜬 내 방은, 분명 따사롭고 포근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발을 맞대며 장난스러운 아침을 맞이하곤 했다.

여행 같았다.

언니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은 여행 같았다.

서로를 부리지 못해 안달이 나, 누가 먼저 침대 밖을 나가 모닝커피를 타 올 것인지,

그것이 우리 세계의 가장 큰 난제였다.

그때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시간 속 내 방은 빛이 가득하다.


그 난제의 답은 언제나 ‘나’인 경우가 많았는데, 입을 삐죽 거리며 커피 2잔을 침대로 대령한 건 나였으니까.

언니는 내가 타 준 커피를 좋아했으니까.

내가 언니가 끓여준 라면을 좋아했던 것처럼.


만인의 기호식품조차 언니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면 그건 내게 가장 반짝이는 추억이 되곤 하였다

그저 라면이고 커피에 불과한 그 식품들에게, ‘언니’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는 순간.

마법이 일어난다.


그것은 곧 내게 잊지 못할 첫 명품 선물만큼이나 값진 것이 되어

제 멋대로 내 머리 속에 샤넬, 프라다, 구찌로 자리 잡는 것이다.

내 머릿속엔 샤넬, 프라다, 구찌가 왜 이리도 많은지,

손에 잡히는 명품은 하나 없음에도 기억에 잡히는 명품은 중국 부자만큼이나 풍족하다.


이런 생각에 웃음이 피식하고 나올 때면, 라면과 커피가 내게 수줍은 듯 말을 건네는 듯하다.


“저, 그냥 라면이고 커피인데요.”
“그래, 커피야. 아침마다 언니 모닝커피 탈 때는 네가 정말 싫었어.”
“그래,라면아. 알아, 너 그냥 라면이라는 거. 넌 급하게 먹을수록 맛있더라.”

언니가 집에서 나간 후, 내 방은 따스하고 포근했던 기억을 잃은 듯 텁텁해졌다.

무거운 공기가 방 전체를 감고 돌아, 방 안에 있으면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얀 커튼 사이로,

똑같이 햇살이 들어와도 그 아침은 그냥 눈 뜨기 힘든 싫은 아침일 뿐이었다.


아침에게 얼굴이 있다면, 그건 분명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의 얼굴일 것이라고.

못 생긴 얼굴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엄마가 퇴원하신 후 엄마는 ‘주부’ 생활을 시작하셨다. 어렸을 때에도 받아본 적 없는 챙김을 다 큰 성인이 되고 나서야 더 받게 되었다.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으면, 엄마가 모닝커피를 갖다 주시곤 하는데,

그러고 보니 언니가 나간 후 혼자 편하게 마신 모닝커피는 다 마신 적이 없다.

늘 한 입, 두 입 정도 마시고는 결국 남은 커피는 싱크대에 버려졌다.


언니와 모닝커피를 타지 않기 위해 벌이던 치열한 전투가 빠져버려서 일까


언니가 없이 맞이하는 아침은 더 이상 내게 여행 같지 않았고,

언니가 없이 맞이하는 내 방 안의 공기는 더 이상 포근하지 않았으며,

언니가 없이 마시는 모닝커피는 내 하루를 깨워주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잘 살아가는 걸 보면,

웃기까지 하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구나 했다.

그저 내 일상 속에 여행, 포근한 공기, 맛있는 모닝커피. 딱 그 정도가 빠진 정도.

그래서 조금은 쓸쓸해진 정도.


언니는 내게 여행, 포근한 공기, 맛있는 모닝커피였나 보다.


그런 것들이 내 일상에 결여된 후 글쓰기는 척척 진행되었다. 하나를 내어주고, 하나를 되받으니,

이건 무슨 정치 인가 싶었다.


사실 하나보다는 많이 내어준 것 같은데. 하고 어리광을 피워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언니에게는 언니의 시간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시간이 있으니 나는 살아야 했다, 잘.


그래서 부쩍 “생각보다 잘 이겨내었지?”하고 나 자신에게 관대함을 내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또 그것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내 곁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대목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그렇게 텅 비어 버린 공백을 누군가가 들어와 새로이 채워준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이러한 마법을 파울로 코엘료는 “소울 메이트”라고 칭한 걸까.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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