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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Feb 01. 2016

양파 연대기

비겁했던 시간들은 모두 끝이 났다.


비겁했던 시간들은 모두 끝이 났다.

아직 오지 않은 어른들의 시간을 기약하며,

들뜬 마음으로 세운 공약들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학년을 맞이하기 전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했던

새 공책, 새 볼펜, 그리고 이름 쓰기.

1년 동안 다 채워지지 않은 공책을 뒤로한 채, 늘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의 겨울방학은

새 학용품들을 사는 것으로 분주했다.


학용품들은 늘 나와 함께,

나의 새 학기와 마찬가지로 새 것들 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 학기가 성공적일 것만 같았으니까.


그것은 어린 꼬마가 그 나이에만 치를 수 있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음을.


그렇게 청소년기가 오고,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새 공책 따위는 사지 않아도 됐다.

1년 동안 채워지지 않은 공책을, 다음 새 학기에도 쓰기 시작했으니까.

어린 꼬마의 분주했던 의식이 시시해지는 날이 온 것이다.


그렇게 꼬마의 의식은 사라졌다.


꼬마의 의식이 사라진 뒤에는 “다이어리”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꼬박꼬박 다이어리에 일기나 짧은 글귀를 적곤 했다.

삐뚤삐뚤한 글씨가 거슬려 쓰지 못했던 다이어리를, 비로소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대학생이 될 때까지 열심히 썼던 다이어리들이 내 책장의 일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지금도 가끔 열어보면 뿌듯한  그때의 시간들이,

적막하다.


20살이 된 후에도 다이어리는 꾸준히 샀지만,

다이어리를 펴 보면 하얀 백지들이 더 많았다.

다이어리를 쓸 시간조차 없을 만큼 꽤나 바쁜 대학생활이었으니까.


간혹 보이는 글귀들은, 훨씬 정돈되고 어른 같아졌다.

역시 짧은 인생이지만 줄곧 글을 써온 사람의 다이어리구나. 하고 스스로 뿌듯했다.

필요 없는 이음새나 단어들은 줄어들고,

괜히 거창한 단어를 휘 갈기던 청소년기와는 사뭇 다른 내용의 일기들이었다.


소설을 읽지 않아도, 영화를 보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을, 평범한 일상의 단어로, 꽤나 그럴듯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대학생의 글이었다.


일상적인 소재와, 단어들이 그 시간들을  더욱더 적막하게 만들었다.

흑백의 느낌이 물씬 나는, 그런 다이어리랄까.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대학 졸업을  앞둔 나이가 되자,

어엿한 여자로, 또 성인이 되어가는 사람으로서의 글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예전 글들은 그 주제가 오직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많았는데,

점점 그 틀을 벗어나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글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했다.


이렇게 얼마 되진 않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나열해보니

지나간 시간들은 모두 비겁하다.


어린 나이를 무기로 어른의 시간을 쉽게 기약하고 다짐하며

엉뚱한 자신감에 사로 잡혀 지나치게 힘찼다.

지나치게  힘찼던 그 시간들은 정상이지만,

어린 나이에 안주해버렸던 태만함이 그 시간들을 비겁하게 만들어 버렸다.


젊음도 늙음도 내가 이룩해낸 무언가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비겁하게 굴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 쉽게 확신하며.

오히려 사회인이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어린 나이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비겁해져 버린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나의 무기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사회인으로서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적용 가능한 면죄부.


차라리 그런 것들을 직접 입 밖으로 내뱉으니,

오히려 나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 면죄부, 지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실컷 쓰련다 라며

조금 얄밉게 굴어도 사람들은 나를 비겁하게 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들이 똑같이 주어졌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고 싶었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_

아직도 젊은 청춘인 내가,

문득 “돌아가고 싶다, 어려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어른의 반열에 올랐음을 깨닫는다.

아, 이제 비겁하게 기약만 해서는 안 되는 시간이 왔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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