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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Jan 11. 2019

편지

- J에게 마음속으론 9147번도 더 했던 말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불행에서 비롯된

나의 성숙함은 불행이었습니다.


불행에서 비롯된 성숙은 극단적이었기 때문이죠.


함께여서 행복한 모든 시간들이 너무 벅찼습니다.

함께여서 행복한 감정보다 이후 잃어버렸을 때 감당해야 할 슬픔이 더 두려웠거든요.


누가 더 많이 좋아했나를 따지는 것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겠지만

아마 우리는 본인이 상대방을 더 많이 좋아했었다고 얘기할 것 같습니다


늘 한발 늦게 표현하던 나를 보며

마음을 열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던 당신이지만.


사실은 늘 한 발씩 먼저 가고 있어,

조바심에 두려워했는지도 몰라요, 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약속 시간까지 오직 당신에게 보이기 위해 세수부터 화장까지 다시 하던 나를,

가끔은 옷이 너무 맘에 들지 않아 데이트하러 가는 길에 옷을 사버리던 나를,

기념일과 당신의 생일이 다가오기 몇 개월 전부터 이벤트와 선물을 준비하던 나를,

지나가듯 말한 당신의 얘기에도 몇 날 며칠을 신경 쓰던 나를,

나를 너무나도 안심하던 당신에게 조바심이 나서 고민이던 나를,

당신에 대한 생각에서 좀 벗어나고 싶어 일부러 더 바쁘게 살던 나를,


아 물론 함께하던 행복한 시간 속에서도 불행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던 엄마의 중환자실행이라던가, 그런 일들.


너무 무서워서 손이 벌벌 떨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엉망이었지만

혹시라도 어린 나이 탓이 될까,

맘껏 당신 앞에서 울어보던가, 때를 써보던가, 당황스러운 마음이라도 털어놔보던가, 어느 것도 하지 못한 나를,

그저 담담하게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나를,


그런 나를 너무 잘 견뎌주고 있다며 대견스러워하던 당신을.  


결국 기대지 못한 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고,

벽이 생겼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 잘 보고 있어"로 시작된 드라마틱한 재회도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진작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고 싶었지만, 다시 만나게 된 이후로는

어쩐지 무겁거나 어려운 이야기들을 꺼내기가 힘들어져서는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날이 많아졌어요.  


뭔가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는 현실에 안도하기도 합니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아직도 그게 쉽지 않은 나에게,

확실한 건 내가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분명 내가 당신에게 줬을 상처들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만남을 기대할 수도, 기대해서도 안된다는 것.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내가 변한 만큼 당신도 변했을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 밤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지금 다시 만나고 있는 우리 둘 사이보다

서로가 떨어져 있었을 때의 우리가 더 애틋하고, 가까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떨어져 있어야만  애틋한 관계를 다시 이어 붙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럼에도 우리는 같이 주말을 맞이하겠죠?


이런 고민들이 무색해질 만큼의 시간이 얼른 흘러버렸으면, 하고 맘속으로 바란 적도 많습니다.


여하튼 이번 주도 고생했을 당신의 한 주를 다독이며 편지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시간이 흘러 돌이켜봤을 때 미안함보다 사랑이 더 가득한 만남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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