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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Jan 05. 2023

고양이의 권력

치즈와 앙꼬는 한배에서 나왔다.

치즈는 핑크색 발바닥에 노란색 줄무늬 털옷을 입었고, 앙꼬 쪽은 검정 발바닥에 갈색 줄무늬 털이다.

이렇게 다른 둘을 보며 그들의 아빠는 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해 본다. 실제로 암고양이는 발정기 동안 여러 번 배란과 임신이 가능하며 아빠가 다른 아기들을 한 번에 낳기도 하니까.

덩치가 커다랗고 잠이 많으며 멧집은 장사인데 소근육 조절이 어려워 앞발을 사용할 때 늘 자신이 없는 수더 분한 치즈의 아빠를 떠올려본다. 몸집이 다부지고 날렵해 작은 동물이 파놓은 구멍을 잘 뒤지고 높게 점프하여 낮게 나는 새쯤은 재미로도 잡으며, 부지런히 털손질을 해 윤기 있는 겉옷을 뽐내는 멋쟁이 앙꼬의 아빠도 상상해 본다.

자신들의 2세를 야무지게 키워 줄 아름답고 건강한 암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다툴 때 그들은 어땠을까.

치즈 쪽은 하악하고 으르렁 거리며 힘을 과시하여 덩치 속에 숨은 두려움이 들키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앙꼬 쪽은 날씬한 몸을 재빨리 움직이며 잽을 날리고 높은 곳에 뛰어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위세를 뽐냈을 것이다.

두 수고양이는 나름의 매력이 넘쳐 암고양이는 둘 모두를 거부하지 않았고 세상에 아들 치즈와 딸 앙꼬를 각각 남겼다.

친구의 친구가 돌보고 있는 앙꼬와 치즈를 구경 갔을 때 둘은 집 마당 대나무 밭을 놀이터 삼아 들락거리고 있었다. 앙꼬의 덩치가 더 컸던 시절이었다. 작은 털뭉치 둘이 엎치락 뒤치락하다 보면 어김없이 앙꼬가 치즈를 눌러 치즈가 깨앵깨앵 울곤 했다. 이 모습을 앙꼬의 아빠가 보았어도 얘야 그래도 동기인데 그만해두어라라고 타이를 지경이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선물로 가져온 고양이 장난감, 깃털이 달린 낚싯대를 먼저 차지하고는 우리가 더 놀아주려 잡아당길 때마다 우리에게 으르렁, 아기 맹수의 소리를 내는 건 치즈였다. 소유할 줄만 알고 놀 줄을 몰라 욕심부리는 모습, 치즈의 아빠가 봤어도 웃고 갈 판이었다.

그랬던 둘은 우리 집에서 살게 되고 발정기가 다가온 치즈와 앙꼬는 차례로 중성화 수술을 했다. 오전에 케이지에 실려 가는 치즈를 보며 앙꼬는 소리 높여 빼앵빼앵 울었다. 어디 가냐고, 걱정된다고, 건강히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나절만에 집사말로 땅콩이 털린 치즈가 고환에 소독약 냄새를 달고 맥없이 돌아오자 앙꼬는 금세 치즈를 반기며 사타구니 쪽을 킁킁댔다. 치즈가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엉덩이를 웅크리고 꼬리를 내리자 앙꼬는 눈치 빠르게도 얼른 물러났고 침대 뒤 은신처로 몸을 숨기는 치즈를 뒤따르려다 멈춰 앉았다. 그리고는 치즈가 긴장이 풀려 스스로 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었다. 그날 이후 앙꼬는 치즈가 거는 장난을 적당히 힘조절하며 받아주고 야무지지 못한 치즈가 지저분하게 남겨둔 항문도 자주 핥아주었다. 중성화 수술 이후 유난히 잠이 많아진 치즈는 앙꼬의 그루밍을 받으며 옷장 구석에 쌓인 스웨터 위에서 깊이 잠을 자다 앙꼬가 어디선가 발견한 장난감으로 노는 소리가 들리면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오곤 했다.

누나와 남동생 같았던 그들의 관계는 앙꼬가 중성화 수술을 하고 돌아온 날부터 달라졌다.

암컷 고양이는 개복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수고양이와는 달리 수술 후 경과 관찰을 위해 하룻밤 입원을 하여야 했다. 앙꼬가 퇴원하는 날 나는 붕대를 감고 그루밍 방지를 위한 특별한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에 안쓰러움과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의 아픔과 고단함을 덜어주고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앙꼬가 병원으로 떠나던 순간에 옷장에서 잠을 자느라 인사를 못했고 그녀가 없이 지내는 밤에도 울지 않은 치즈는 그녀가 돌아온 순간에도 또한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이동장에서 내내 몸을 떨던 앙꼬는 집에 돌아와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침대 서랍 뒤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날카로운 캬악 소리에 앙꼬를 살피러 가니 어느새 잠이 깨어 나온 치즈가 함께 있었다. 동물 병원에서 소독약과 낯선 동물 냄새를 잔뜩 묻히고 하얀 거즈옷을 입은 앙꼬, 치즈에게 그녀는 낯선 고양이였다. 앙꼬는 고통과 두려움으로 휴식이 필요했고 그녀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위협해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치즈 또한 초긴장 상태여서 우리는 다른 방에 둘을 가둘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앙꼬가 먹이를 먹을 때, 화장실을 사용할 때마다 치즈는 으르렁대고 앞발을 휘두르며 자신에게 그녀가 이방묘임을 날렸다. 몸동작이 날래 어지간해서는 밀리지 않던 앙꼬도, 몸의 상처와 동기의 구박에 당황하여 기를 못 편 채 다만 구석으로 몸을 피해 불편한 자세로 쪽잠을 잘 뿐이었다. 앙꼬가 회복할 때까지 치즈의 접근을 막으려 방에 가두어도 봤지만 으레 그녀 쪽에서 먼저 문 앞에서 ‘야옹’대며 치즈를 찾았다. 동기를 못 알아보고 철벽을 치는 치즈를 향한, 위세를 잃은 앙꼬의 짝사랑. 이 상황이 우습다가도 안타까워, 앙꼬가 거즈 옷을 벗는 날 어떤 반전이 있을까, 우리는 내심 기대했다.

애타는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옷을 벗은 앙꼬가 현관에 들어섰다. 역시나 낮잠에 빠진 치즈에게 앙꼬가 먼저 다가가 얼굴을 핥자 치즈는 조금 고민하다 옆자리를 내어준다. 마침내 동기를 알아본 것인지, 이상한 옷을 입은 괴생물체가 아닌 낯익은 종족의 냄새에 안심을 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현대 과학 기술로는 고양이와 좀 더 깊은 의사소통은 어렵다. 앙꼬 또한 자신을 다시 받아 준 치즈의 태도와 몸의 회복 중 무엇 때문인지, 예전의 당당하고 우아한 몸놀림으로 자신의 공간을 활보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밥그릇 앞에 있던 앙꼬는 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치즈를 보곤 얼른 물러나며 양보를 해준다. 치즈가 밥을 다 먹고 돌아서자 그 얼굴에 머리를 대고 이내 혀로 부드럽게 쓰다듬는 앙꼬. 치즈는 복종의 의미로 배를 대고 드러누워 품위 있고 관대한 누나의 사랑을 즐긴다.

건강과 사회적 관계가 자존감에 중요한 요소임은 고양이에게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존감을 회복한 고양이는 잠재적 능력을 맘껏 뽐내며 자신의 능력에 맞는 역할을 차지하고 또 발휘한다. 편안하게 낮잠을 즐기고 순조롭게 식사를 하는 앙꼬와 치즈, 성격도 능력도 서로 다른 두 고양이의 흥미로운 권력관계를 보며 사람 사이의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역시 권력은 자격이 있는 이에게 쥐어져 인자하게 행사될 때 복종하는 자 또한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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