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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Jan 05. 2023

조숙한 소녀는 어른 남자를 열망한다.

김원준과 장동건 책받침이 유행하던 시절, 학교 근처 문구점을 뒤지다 옆 동네 중학교 앞까지 와 버렸다.

 불안이 많은 엄마가 키 작고 야물지 못한 딸에게 불량한 오빠들이 있다며 못 가게 했던 그곳, 담배 피우는 중학생 오빠들도 두렵지 않게 한 내 삶의 로맨스는, 열두 살 뜨거운 심장에서 그렇게 태어났다.

 처음엔 엄마 아빠와 함께 시작했다. 요즘 그게 그렇게 재밌다면서? 다들 그 얘기만 해, 오늘 토요일이니까 우리도 한번 보자. 검은 얼굴에 중국말을 쏼라쏼라, 이마에 초승달 모양 흉터가 있는 아저씨가 나오는 드라마였다. 엄마가 깎아준 사과를 먹으며 이상한 아저씨가 나오는 중국 드라마에 시큰둥하던 내가 어느 백성의 가슴 치는 사연에 어느새 먹던 사과를 내려놓고 눈물을 닦았다. 천하에 못된 짓을 한 피고인이 마침내 개작두 판정을 당할 때 체기가 확 가시는 그 통쾌함이란!

 6부작인 에피소드 하나가 끝나고 두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쯤엔 온 가족이 한주 내내 판관포청천 방영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번엔 조강지처와 딸을 버리고 공주의 남편인 부마가 된 나쁜 놈을 처단하는 이야기였는데, 청원인인 조강지처의 사정을 알아보러 갔다가 안타까운 처지를 동정하며 그녀와, 내 또래인 그녀의 딸을 위로하고 연민하는 한 남자의 모습에 반해버리고 말았으니, 그 이름 극 중 전조-판관 포청천의 수행경호원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두근대는 심장, 빨개지는 얼굴, 떨리는 손과 발, 나 왜 이래요? 조연인 그가 안 나오는 장면은 극 중 클라이맥스인데도 여러 번 지연된 인형극 오프닝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듯 초조하고 지루했다. 키다리아저씨와 빨간 머리 앤에서 읽었던 그것, 바로 사랑의 시작이었다. 이럴 수가! 난 어렸다. 마지막 승부의 장동건도, 창공의 김원준도, 사랑을 그대 품 안에의 차인표도 과장된 연기와 달콤한 대사가 재밌다고만 생각했던 어린 내가 사랑에 빠지다니!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공감하며 몰입한 인물은 누구인가. 조강지처인가, 그녀의 딸인가. 내가 받고 싶은 애정의 형태가 무엇인가 고민했던 어린 나, 난 조숙한 소녀였던 것인가 봉가. 내 결론은 쉬웠다. 난 우리 엄마와 나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구해주는 아저씨에게 반해버렸다.

 주변에 전조를 좋아하는 친구는 없었기에 난 외로운 전사처럼 이 동네 저 동네 이 문구점 저 문구점을 배회하며 님의 사진을 수배하러 다녔다. 문구점 주인들은 소녀의 마이너 한 취향을 안타까워하며 곽부성, 임지령, 금성무 등 중화권의 떠오르는 샛별들의 사진과 그들의 기사가 몇 페이지 실린 하이틴 연예 잡지들을 권해주었다. 그것들이라도 달게 사와 스크랩을 시작하던 어느 날, 올해의 10대 건강 대만인에 그가 선정되었다는 조그만 기사를 발견했다. 이름은 하가경, 그는 이미 40대.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많았고 판관포청천 이후에 이렇다 할 성공작도 없었다. 기사에 실린 조그만 사진 속의 그는 건강보조식품 모델처럼 나이를 거슬러 명랑했고 무엇보다 내 맘속의 그 전조가 아니었다. 사랑은 황급히 식었으나, 이후에도 덕질에  쏟은 시간과 열정은 쉬이 주워 담아지지 않았고, 우연히 내 사랑의 바구니 속에 함께 담긴 다른 중화권의 연예인들에게 애정의 그림자가 머물다 그마저 잊혀 갔다.

 다음 해, 아빠 직장을 따라 일 년 간 두 번의 전학을 한 나는, 낯설고 외롭고 무엇보다 열다섯이라 사춘기를 살벌하게 맞을 준비가 끝나있었다. 나를 모르는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내가 돋보이는 길은 교내 학생신문에 독후감, 글짓기를 싣는 것, 그리고 대학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에 입상하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도 써댔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나를 착한 딸로 생각하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살며 사춘기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어서, 공부가 힘들고 지루할 때 딴짓할 것이 딱히 없어서. 시 몇 편은 앉은자리에서 뚝딱 써내는 경솔한 작가였다. 집 근처에 양서가 가득한 도서관이 있어서 문학의 스승들을 십 대에 만날 수 있었다면 튼튼한 알맹이를 가진 겸손한 작가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교우관계가 좁음에 마음이 놓이고 사람 욕심이 없는 터라 적응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학원에 같이 다닐 학교 친구가 없었다. 이틀에 한번 하교 후, 종일반 학원에 갔고 다른 학교에서 삼삼오오 친구가 되어 온 급우들 사이에 외롭지만 성실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학원 선생님과 친구가 되었다.

수학을 사랑해 수학과에 갔다 학원 선생님이 된 그는 동네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고 기타를 연주하며 레크리에이션을 이끌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색색깔의 고운 분필로 아름답게 판서하며 열정적으로 강의하고, 동료 교사보다 학생들의 취향과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기꺼이 관여했다. 이 모든 게 열정적이지만 외로운 사람의 징후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 호감의 시작이었다. 실수였는 지 의도였는 지 기억나지 않지만 (의도가 의심될 정도로 난 로맨스에 목마르고 영악했다), 내 시 노트를 서랍에 두고 갔고 이틀 후 그는 학원 수업이 끝나고 나를 남겼다. 그리고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한 내 시를 묶고, 표지를 만들고 제본 한 작품집을 세 권 내밀었다. 한 권은 자기가 갖고, 한 권은 내가 갖고 한 권은 주고 싶은 친구에게 선물하라 했는데, 줄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께 드리면 누가 만들어 주었는지 대답하기 곤란할 것 같았고 학교 단짝은 나의 시 세계를 기꺼이 받을 의향과 자격이 없어 보였다. 둘만의 비밀이 생긴 그날을 시작으로 그의 삐삐번호를 아는 유일한 학생이 되고, 당돌하게 먼저 한 데이트 신청에선 패랭이꽃다발을 들고나가 그를 놀라게 했다. 어렸지만 그의 행동을 보며 알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걸. 연인에게 사랑받아 본 적 없는 그 순수가 처음엔 맘 놓고 사랑할 근거가 되어 주었지만 함께하는 시간과 표현의 순간마다 그 순수는 나의 기대와 성장을 발목 잡는 유치함이 되었고 마침내는 그의 모든 것이 부담으로 변했다. 셔틀타지 말라고 기다리라며 건네준 그의 차 열쇠가 처음에는 감동이었다가, 날이 거듭되면서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데 부모님이 보시면 뭐라고 해명하지 고통을 부르는 긴장의 시간이 되었다. 밤중에 통화를 하다 보고 싶다며 연립주택 1층에 살던 내 방에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고 기타를 치는 그를 보면 줄리엣의 행복을  느끼다가도 안방에서 기척이 들리는 것 같을 때마다 내 사랑이 일그러지고 바래고 끈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무엇보다 나는 부모님의 믿음과 사랑을 그의 것으로 대체하고 싶은 맘이 없었다. 결국 이 로맨스는 엄마에게 발각되어 그는 학원을 그만두고 난 생애 처음 부모님의 불신의 늪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느끼며 기죽은 사춘기를 보내게 된 사연에서 마무리된다.

 사건이 벌어진 날 눈이 퉁퉁부은 나에게 찾아와 모든 걸 잃은 리어왕의 배우처럼 울며 자기 모습이 초라하지 않냐고 묻던 가련한 남자의 말과 생각을 난 이해하지 못했다. 그 몰이해에서 나를 보았고 마침내 알았다. 내가 원했던 사랑은 내게 새로운 경험을 주고 스스로를 찾게 해 주고 그럼에도 내가 안전할 수 있게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포청천의 전조처럼, 무엇보다 우리 엄마에게도 호감인 그런 사람.


 영화 언에듀케이션에는 내 이상형이 등장한다. 조숙한 고등학생인 제니에게 유머러스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여유, 진짜 어른 남자. 고급스러운 취향을 함께 누리게 도우며, 내가 원하는지도 모르게 원했던 것을 줄 수 있는, 무엇보다 엄마 아빠도 좋아하며 나를 믿고 맡기는 그런 사람. 그런데도 이 로맨스, 파국이다. 생각해 본다. 순수가 가진 맹목성, 능숙이 가진 부정함. 조숙한 소녀에게 무엇이 더 해로운 가. 답을 고민하는 내게 소녀는 말한다. 걱정 말고 사랑하라고. 무엇이든 다 겪으라고. 그리고 성장하라고. 마침내 조숙이 성숙이 되는 그 어느 날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고. 나에게 진짜 귀한 것이 무엇인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관계의 어느 부분에서 나는 그것을 가지고 찾고 만들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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